기록보존실 991

글과 마음

어려운 마음과는 달리 말은 너무나도 쉬웠기에, 저의 말 한 마디는 당신에게 쉽게 오갔지만 당신에게 채 닿을 순 없었습니다. 쉬이 내뱉어지는 말들 사이로 어려운 마음을 담은 감정들은 휘발되었기 때문입니다. 날려간 마음들은 그렇게 제 주변을 맴돌다 잊혀졌습니다. 그렇기에 전 입을 다물곤 했습니다. 어려웠던 마음들이 쉬이 휘발되지 못하도록 입을 꼭. 글을 한 자 한 자 어렵사리 꾹꾹 눌러 쓰곤 했습니다. 글이 이 어려운 마음들을 머금길 바라면서. 채 당신에게 도달하지 못한 편지들이지만, 이 편지들은 여전히 마음을 머금고 있습니다. 언젠가 당신에게 닿기를 기대하면서요.

인간은 왜 사는가?

왜 사는가? 이러한 질문은 삶이라는 것에 대해 근원, 본질을 묻는 것 같기에 이것에 대한 대답이 뭔가 거창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뭔가 그럴듯해 보여야 수긍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것이다. 왠지 '그냥'이라고 대답하기엔 삶의 의미가 없어보이고, 가벼운 대답만큼이나 내 삶이 가볍게 취급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삶의 이유에 대한 질문을 무겁게 접근하면 할수록 삶의 이유에 대한 대답은 그만큼 가벼운 느낌을 가져다준다. '왜 사는가?'에 대한 답변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에 대한 답변을 하지 못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살아간다는데 '왜?'가 어딨나. 그냥 태어났으니 사는거지. 인간이 무슨 역사적 사명을 띄고 태어났나. 신이라는 존재가 '이 세상 만물을 다스려야 할 존..

인간관계 - 수단과 목적성

순수하게 목적성만을 띈 인간관계가 있을 수 있을까? 과연 인간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을까? 어떤 의미에선 인간관계를 포함한 모든 것들은 수단이 될 수 밖에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단이라는 속성이 섞여 있다. 순수 100% 목적성은 없다는 말이다. 꼭 순수할 필요가 있겠냐만은 대부분 사람은 '순수'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순수라는 단어 자체가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오염되지 않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등의 의미를 담고 있고, 오염이나 불순물이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섞이지 않았다는 의미는 무언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흰색과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전적으로 믿을 수 있거나 신뢰를 할 수 있는 듯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앞과 뒤가 다..

인터넷, 말살되고 있는 비판의 문화

대한민국은 참으로 이상하다. 무언가에 대해 비판을 하려면 어떤 자격이 있어야 한다. 인터넷과 미디어 매체의 발달로 누구나 다 빠르고 쉽게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으니 자격 없는 인간들이 선동과 왜곡을 많이 한다. 그런데 이거 참 어려운 문제다. 분명 선동과 왜곡은 문제지만, 어떤 사회 현상에 대해서 나름대로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은 '자유'다. 물론 자유라는 것이 방종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니, 선동과 왜곡이 자유라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전문가가 아니기에 정보가 틀릴 수도 있고, 판단이 틀릴 수도 있고, 그 내용들이 빠르게 전파되어 의도치 않게 선동과 왜곡의 기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쓴 필자의 글만 보면 분명 어떤 사회 현상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거나, 그것을 분석하고 비판하..

옳고 그름

1. 절대적인 옳고 그름은 없다. 2. 이 세상의 모든 도덕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3. 도덕적 잣대는 개인마다 다르다. 4. 도덕적 잣대에 우위는 없다. 5. 당연한 권리는 없다. 6. 인권은 피와 폭력으로 쟁취한 것이다. 7. 모든 인권은 쟁취한만큼 보장되고 강제하고 있을뿐 마땅히 지켜져야 할 절대적 인권은 없다. 8. 절대적인 도덕, 인권을 찾는 것은 신을 찾는 것과 같다. 9. 법과 제도는 선과 악, 도덕으로만 제정되지 않는다. 10. 법과 제도는 사회적 손해-이득의 관점에서 만들어진다. 11. 법과 제도는 따르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는 방향으로 강제하고 있을 뿐이다. 12. 어쨌든 결국은 개인의 선택이다. 13. 모든 개인의 선택에는 사회적 책임이 숨겨져 있다. 14. 그러나 외부적 요인들을 사회..

자존감 - 살아가다보면에 대한 단상

결과물에 대해 열등감에 쌓이지 말 것. 본인을 먼저 낮추지 말 것. 그렇다고 오만하게 굴지도 말 것. 부럽다면 그것에 대해 인정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뭔가를 시행할 것. (이건 마치 등반하는 것과 같다. 누군가 자신보다 더 빨리 등반하고 있다면 그건 부러워할 일이지, 자신을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다.) 자신의 초라함이 부끄럽더라도 인간관계를 끊지 말 것. 주변의 환경들이 날 쥐고 흔들지라도 그건 자연재해처럼 그냥 처리해야 할 하나의 문제라는 걸 인식할 것. 결과물(목표물)과 가치를 혼동하지 말 것. 결과물에 향해 내가 행하는 충실함에 가치를 두고 스스로를 긍정하여 평가할 것. (등반하고 있음이 중요하지, 등반의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등반의 속도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과정에 대해 가치를 중히..

자존감 - 살아가다보면

종종 살아가다 보면 모두에게 잊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나란 존재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깔끔하게 지워지는 것이다. 종종 아무도 모르는 외국에 나가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 생각의 연장선이다. 그건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고통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서, 한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이, 부끄러운 자신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없는 눈치를 만들어 내서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정작 자신은 남들에 대해 평가한다거나, 평가에 따라 타인에 대한 태도를 바꾼다거나 할 생각은 없으면서, 타인은 자신에 대해 그럴 것이라고 여긴다. 인맥으로서 관리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겠지만, 대게 우리가 친구를 사귄다고 한다면 그 친구가 직업을 가졌든, 대학을 나왔든 못 나왔든, 돈을 벌..

고민들

하잘 것 없는 고민이 누군가에겐 무겁고 답답한 고민이 되기도 하고, 가슴 깊은 고민이 누군가에게 별 거 아닌 고민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누군가는 술로 잠을 청하고,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찾아오는 어두운 이 밤, 얽히고설킨 저마다의 고민들이 누군가에겐 가볍게, 누군가에겐 무겁게 내려앉는다. 고민 그 자체로도 벅차오르는 감정들이 소용돌이 치는데, 고민들의 경중을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 고민거리를 하나 더 늘릴 뿐이다. 고민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저마다의 고민들이 유일한 세계인 것만 같아서, 딱 한 발만 비켜 서면 되는데 그 한 발 비켜 서는게 어려워 헤매이곤 한다. 삶이란 무엇인가. 삶을 놓고 보면, 이 또한 지나갈 것이고, 이 또한 어느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즉, 죽지만 않는다..

사회적 신뢰도를 박살낸 LH 사건

공(公)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공기업은 어느 한편의 치우침 없이 공정하게 모든 국민을, 사회 구성원 개개인들 모두를 위한 기업이다. 그렇기에 공무원이, 공기업이, 공직자라는 자리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 일개 개인이, 일개 단체가, 감히 다수 - 공공을 대표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자리로서 그 상징성은 무엇보다도 신뢰가 중요하다. 그러나 이번 LH사건은 이러한 신뢰를 완전히 부숴버렸다는 점에서 굉장히 큰 사건이다. 만에 하나 이들이 완전히 해체된 후에, 그 자리에 새로운 공기업이 생겨난다고 했을 때, 국민들이 뭘 믿고 업무를 맡길 수 있겠는가. 사회적 신용도, 사회적 신뢰도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십 년 동안 쌓이고 쌓여 사회 속에서 꾸준히 작동된 끝에 형성된 것이다. 공과 사를 구분하고..

가치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여러분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고 믿나요? 아장아장 걷는 3살짜리 아기에서부터 80살의 나이먹은 사람까지. 아니면 저기 먼 아프리카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에서부터 여기 대한민국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까지도. 난 모든 사람이 존귀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이라는 이유로, 가죽을 뒤집어 썼다는 이유만으로 존귀하진 않죠. 다만 인간이라는 카테고리로서 동등하다고는 생각해요. 엄밀히 말해서 존귀하다는 것과 동등하다는 건 다른 영역이에요.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볼게요. 1 + 1 = 2 라는 것에 가치가 있나요? 그건 단지 계산식일 뿐이에요. 그저 1에다 1를 더하면 2가 된다는 것을 표현하는 어떤 알고리즘 같은 것이죠. 그 계산식에 도덕이니 사랑이니 어떤 우위적,..

자기 확신

자기 확신. 살아가면서 자기 확신은 매우 중요하다. 그건 내가 하는 지금의 행동들이 틀리지 않았고, 내가 원하던 방향대로 옳게 가고 있다는 자신감이다. 그것은 자존감과도 크게 연관 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신의 행동들에 대한 결과를 쉽사리 믿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들 앞에 놓인 선택지들은 결과가 하나같이 최악으로 상정되어 있으며, 그것을 극복하고 대비하려는 움직임 대신 선택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한다. 자기 확신이 없으면 무얼하더라도 최상의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 살다보면 나의 선택이 별로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거란 걸 알면서도 선택해야 해야만 하는 상황이 있다. 대신 그 선택의 결과를 노력으로 그나마 최선의 상태로 만들어서 피해를 최소화해야만 한다. 그러나 자기확신이 없으면 선택 이후의 행동에 ..

생각보다 최악은 아니다.

누군가로부터 내가 고려치 않던 선택지들이 생각보다 괜찮은, 매력적인 선택지 일 수 있다는 소릴 듣는다면 자존감을 회복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자존감을 외부로부터 회복하는 것 자체가 문제지만서도. 여튼간에. 밑바닥이라 생각했던 것들 밑에 더 한 바닥이 있음을 깨달았을 때. 인생을 채 차오르지 못하고 바닥 없는 늪으로 끝없이 가라앉고만 있다는 걸 자각했을 때. 주변은 보이지 않고, 자신에게 존재하는 하자들과 걱정들로 자존감은 한없이 바닥을 친다. 그리곤 주변에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며 자신과 비교하게 된다. 비교하면서 자존감 깎아먹는 것이 문제라는걸 잘 알지만 눈을 뜨고 있으면 풍경이 보이는데 어찌 할까. 서 있는 위치가 다르면 풍경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차라리 이 풍경을 몰랐더라면 어..

중립기어와 마녀 사냥

누군가 상대방을 지목해서 나를 괴롭혔다, 나를 때렸다고 주장했을 때,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우리가 무죄추정의 원칙을 정한 까닭은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이가 정말로 피해를 당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흔히들 무고죄라고 한다. 가해를 저지른 사람이 증거를 인멸하는 일이 빈번하듯이, 반대로 피해를 당했다는 식으로 포장해서 누명을 씌우는 일도 빈번한다. 그렇기에 우린 일어난 일을 알 수 없고, 증거에 입각해 추적하며 밝히는 것이다. 우린 철저하게 제삼자의 눈으로 피해자와 피의자 둘 모두의 주장을 의심해봐야만 한다. 그러나 요즘 '공감'이라는 말로 포장되는 시대라서 그런지, 아니면 '약자는 선하다'는 고정관념 때문인지 몰라도 피해 사실을 주장하면, '피해자'라는 타이틀을 달아주고 상대방을 욕하기 바쁘다. 중립..

후기 자본주의에 들어선 대한민국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장점은 누구나 다 참여할 수 있다는 개방성에 있다. 물론 현실적인 제약이 있긴 하지만, 이론적으론 누구나 아이디어만 있으면 투자를 받아서 아이템을 만들 수 있다. 마케팅, 아이템, 자본. 이 3박자가 맞아떨어져야만 성공적인 아이템 출시가 가능해지지만, 일단 이론적으로는 아이템이 훌륭하면 투자 계획서를 통해 투자자들을 모집하고, 그 자금으로 마케팅 및 생산까지 한 후에 유통을 통해서 판매하면 된다. 그 안에 가격 경쟁력이라든지, 생산 가능 수단 확보라든지, 광고라든지, 투자자들 설득 및 모집이라든지, 유통라인을 확보한다든지, 상대 기업의 견제라든지 무수히 많은 단계들이 있고 그 한 곱이곱이 넘기는 것이 힘들지만 말이다. 결국엔 앞서 말한 3가지(아이템, 자본, 마케팅)를 얻기 위해 활동..

한국인들의 유교적 신화와 자본주의

살다 보면 한국사람들에게는 2가지 생각이 확고하게 신화로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1. 노력은 보답을 받는다. 2. 착한 자는 복을 받고, 악한 자는 벌을 받는다. 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자본주의(?)를 끼얹게 되니까, 1. 노력은 돈(보답)을 가져다준다. 가져다줘야'만' 한다. 2. 착한 자는 돈(복)을 받고, 악한 자는 경제적 손해(벌)를 받아야 한다. 받아야'만' 한다. 로 귀결된다. 이러한 확고한 믿음은 당위법칙으로 변해서 그래야만 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학창 시절의 공부(노력들)가 전문직, 대기업 사원(넉넉한 돈벌이)으로 이어져야만 하고, 학창 시절에 놀던 아이들은 밑바닥(경제적 어려움)에 깔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성이 별로인 사람은 절대로 성공해서는 안되어야만 하는 것이..

소비력과 권력 - 사람들의 성향

소비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 시장경제에선 소비력이 곧 권력이다. 소비자들 눈치를 안 볼 수 있는 기업이 있다면 이미 그 기업은 충성도 높은 고객을 확보하고 있거나 소비자들의 눈치를 안 봐도 될 만큼 더 큰 시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면 그 기업 아니면 대체제가 없는 독과점 상황이거나. 대부분의 기업들이 여성의 눈치를 보는 이유는 여성들의 소비력 때문이다. 마케팅에서 여성은 세 명의 소비자라는 말이 있다. 여성 그 자신, 여성의 남편, 여성의 아버지다. 그들의 소비는 자본주의가 정한 이상적 가족 형태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남자가 벌어오고, 여성은 내조하는 것이 이상적인 가정이었기에, 가족의 소비를 담당하는 것은 여성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소비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자식들과 그들의 남편 - 가족을..

비스타즈에 대한 단상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만화 중에 비스타즈라는 만화가 있다.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의 세계를 다룬 만화다. 그 세계에서 육식동물은 억압해야 할 동물로 취급을 당한다. 그들은 강대하니까.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조심해야 하고, 긴장해야만 한다. 필요에 따라서는 성장을 약으로 억제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곰의 입장에서는 가벼운 인사의 의미로 잽(zap)을 날렸지만, 그 잽으로 인해 인간이 팔이 날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항상 육식 동물은 연약한 초식동물을 배려해야만 하고, 그들의 기준에 맞춰서 행동해야만 한다. 물론 그들 나름대로의 삶을 존중받긴 한다. 초식동물은 초식동물대로, 육식동물은 육식동물대로 그들의 신장에 맞는 집과 그들의 각자의 역할에 맞는 직장을 갖는다. 필요악으로서 진짜 고기를 파는 뒷골목 시장도 존..

선(line)과 해상도

뭐든지 선(line)이 중요하다. 얼마 전 필자는 '공부란 세상에 대한 해상도를 올려주는 행위'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분명 공부를 한다는 것은 지겹지만, 그것은 나의 세계를 열어주고, 나와 사회의 만남의 장을 넓혀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신조차도 죽어버린 이 세계 속에서 나를 구원할 것은 나 자신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를 이해하고, 내가 있는 이 세계를 이해한 뒤에야, 나의 지표를 명확히 세우고 세계 속으로 나를 밀어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세계의 만남의 가능성을 증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신라시대 골품제를 생각해보면 된다. 그들은 뛰어난 능력이 있음에도 출생의 한계 때문에 그 능력을 펼칠 수 없었다. 이러한 제한들은 시대가 흐르면서 하나씩 하나씩 풀렸고, 마침내 현대에 이르러서 모든 ..

비트코인

연봉이 그 사람의 가치를 정해주지 않는 것처럼 비트코인의 시세가 비트코인의 가치를 정하지는 않는다. 튤립의 역사를 보라. 투기는 언제나 존재해왔고, 그 결과는 거품과 거품의 폭발이었다. 비트코인은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을지언정 결코 화폐를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기술적 우위가 있는 것과 그것을 법과 제도 속으로 안착시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과연 비트코인이 투기 상품 이상의 무언가가 될 수 있을지 사뭇 궁금하다.

끝장을 봐야 할 것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끝장을 봐야 할 것들이 있다. 끝장이라 말을 하면 뭔가 어감이 좀 부정적이고 쎄 보이나. 여하튼 끝을 봐야 한다는 소리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끝이 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가령 아이가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레 성인이 되는 것. 이런 것들은 그저 세월이 흐르면 자연스레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행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우리가 세운 목표를 도달하기 위해 노력을 요구한다. 그 목표들은 일평생을 거쳐서 이루어야 하는 것들도 있지만 특정 시기에만 이룰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자면 초등학생 스키 대회에서 우승한다는 목표를 성인이 이룰 수는 없지 않은가. 그나마 이런 것들은 특정 시기의 제약이 존재하기에 '우승하지 못함'으로 끝을 냈다고 볼 수 있다...

인터넷, 모르는 것이 약이다.

인터넷에는 지식인들도 넘쳐나지만, 정신병자들도 넘쳐난다. 그리고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현실에서의 삶을 사느라 인터넷의 활동을 자주 하지 못한다. 그 결과, 인터넷은 점차 시간을 허비하게 만드는 게시물과 정신병자들이 써놓은 게시물들로 가득 차게 된다. 앎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앎으로써 앞으로의 우리 삶을 더 풍족하게 만들어 줄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삶에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향이 없을 지식으로, 이것은 오히려 우리의 삶을 갉아 먹는다. 그리고 인터넷의 상당수의 게시물들은 명백히 후자다. 아는 것이 힘이다. 모르는 것이 약이다. 인터넷은 늘 몰라도 되는 소식과 게시물들로 넘쳐난다. 그리고 이것을 이슈화시켜 사람들을 꼬이게 만든다. p.s 물론 플랫폼에 따라, 필요에 따라 수단으로 잠깐 이용..

모든 것은 때가 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는 건, 남들이 할 때 해야만 한다는 것. 내가 지금 해내가는 것들이, 해내갈 것들의 이 두근거림들이 누군가에겐 밋밋한 반복에 일 수도 있다는 것. 사람은 나이대에 맞는 경험들이 있고, 그 나이대에 맞는 경험들은 그 감각을 타인과 공유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그때를 놓쳐버린 사람들은 후에 그 경험과 감각들을 얻게 되더라도 같이 공유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 때는 늦어질수록 더욱 그렇다. 모든 것들은 때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매번 매 순간 느끼는 감각은 달라질 테니까.

공부란 세상의 해상도를 올려주는 행위

'공부란 세상의 해상도를 올려주는 행위' 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이 한 문장이 '왜? 공부를 하지?' 라는 질문에 대해 가장 명쾌한 답변이라 생각한다. 세상은 넓고, 깊다. 그리고 우린 그 세상 위를 떠다니는 조각배다. 차라리 위 글처럼 세상이 모니터처럼 바라만 볼 수 있으면 다행이지, 세상은 우릴 향해 끊임없이 덮쳐온다. 그리고 우린 그것을 몸으로 직접 부딪치며 이겨내야만 한다. 만약 이겨내지 못한다면 정처없이 휩쓸리다가 결국 가라앉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린 세상으로부터 끝없이 흘러들어오는 수 많은 정보를 이해하고, 분석하고, 생각하고, 추론하여 예측해야만 한다. 정보들 속에 숨겨진 사전 경고들을 파악해야만 한다. 우리들 공부하면서 익히는 지식이라는 것은 단편적인 정보에 지나지 않지만, 공부를 ..

감각을 공유한다는 것의 즐거움

감각을 공유한다는 것의 즐거움. 지금 이 순간의 나의 감각들이 네가 느끼는 감각들과 분명히 다를 테지만. 우린 분명히 각자의 시각대로 너의 생각들이 나와 같다고 여기고 있을 테지만. 그래도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착각들이,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느낌들이 너무나도 간질간질해서. 그래서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곤 한다. 각기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이 한 작품을 통해 감각의 공통점을 발견한다는 것은 반가움과 친밀함,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이는 공통된 하나의 작품을 보면서 서로 다른 감각과 생각을 알게 되는 신선함과 신기함과는 또 다른 감정들이다. 전자는 따뜻한 느낌이라면, 후자는 시원한 느낌이랄까.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이 따뜻함과 시원함의 연속이다. p.s 친밀함도 반복되다보면 미적지근해지고 신선함도 ..

현실적 제약과 욕망 그리고 계급과 자본의 영향력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다양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데 그 욕망을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그나마 어린 시절뿐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상당히 제한적인데, 그 이유는 아이의 신체적, 정신적 미발달과 경험 부족으로 인한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달리기를 너무나도 좋아한다면 그 아이는 달리기를 자주 하려할 것이지만 건강한 20대에 비해 체력과 육체가 덜 발달이 되었기에 달리기를 자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의 부모들은 그 아이가 진정 달리기를 좋아하는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다. 다른 활동에 비해 좀 더 자주 달리기를 할지언정 정말로 마라톤 선수만큼 달리기에 대한 열정이 있는지는 외적인 행동 관찰이 힘들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측면은 더욱 관찰이 힘들다. 아이들..

언론의 힘은 약해졌지만 영향력은 강해졌다.

필자는 이틀 전쯤에 맞춤형 알고리즘과 정치적 양극화에 대해 글을 썼었다. 그 글은 사람들이 맞춤형 서비스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정보를 편식하게 되고, 그로 인해 정치적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진다는 내용이었다. 정치적 양극화와는 별개로 사람들에게 있어서 맞춤형 서비스는 언론(흔히 말하는 신문이나 방송과 같은 대중매체)의 힘 그자체도 크게 약화시킨다. 사람들은 더 이상 언론을 언론으로 생각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제 정보를 어디에서든 얻을 수 있게 되었으며, 어디에서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여론을 형성하던 역할은 이제 언론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됐다. 그러나 문제는 그만큼 여론이 형성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또 다른 의미로 게으른 행동주의자들이 되어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