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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과연 동조일까?

어둠속검은고양이 2017. 10. 30. 06:03

침묵은 과연 동조일까.

침묵은 암묵적인 동의일까.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 - 마틴 뉘물러

'가장 큰 비극은 악한 자들의 아우성보다도 선한 자들의 침묵이다' - 마틴 루터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는 마틴 뉘물러의 시이고, '가장 큰 비극은 악한 자들의 아우성보다도 선한 자들의 침묵이다'은 마틴 루터 킹의 연설 중 한 문구이다. 이 두 문구를 놓고 봤을 때, 하는 말은 명확하다. '행동하기'를 촉구한다. 그리고 그 행동을 통해 연대를 촉구하고 있다. 행동하지 않는 것의 위험함을 일깨워주고 있는 좋은 글귀라 생각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도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다.'고 주장했으니, 아주 먼 과거에서부터 우리는 늘 대중의 행동을 촉구해왔던 셈이다.

 

필자도 좋은 말이라 생각했다. 의심할 여지 없는 맞는 말이라 믿었다.

집단을 이룬 사회에는 문제가 발생할 수 밖에 없기에, 개개인은 문제해결을 위해 정부라는 기구를 통해 공권력을 위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개인과 정부(혹은 사회) 사이에는 권력의 차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정부와 개인이 대립하게 될 경우, 개개인의 연대를 통해 집단을 형성함으로써 권력을 대등하게 만들어야 필요가 있었다. 연대는, 무리짓는 행위는, 사회를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행위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플라톤, 마턴 루터 킹 등과 같은 유명인사들도 행동을 촉구했고, 그 행동이 나아가 연대로 이어지길 원했을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말을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와서 다시 이 말에 의문을 던져본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은연중에 저 말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다(?). 개인과 사회를 뗄 수 없고, 사회 생활을 하다보니 자연스레 저 말이 옳다고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요즘 한창 이슈인 '여혐'이라는 사상도 저 궤에 올라와 있다고 생각한다. 남자들이 '가부장제에 침묵'하고 살아왔으니, 암묵적 동의를 하고 있었던 셈이고, 그렇기에 여혐의 가해자들이라는 식의 논리일 거라 생각한다. (사실 여혐에 대해 쓰려고 이 글을 꺼낸 건 아니다. 침묵이 과연 동조인지 순수한 궁금증이다.) 하지만 내가 저 글귀에 의문을 표하게 된 것은 내가 방관자의 입장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다.

 

최근에 알게 된 TMI라는 단어가 있다. Too Much Information(너무 많은 정보)라는 뜻이다.

사실 개인 하나가 세상 살아가는데 필요한 정보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인지능력, 사고능력, 일할 수 있는 능력, 지출과 수입 균형 능력, 도덕적 판단능력 정도만 있어도 충분하다. 하지만 이런 능력들과 개인의 삶이 사회와 연결되면서부터 필요능력과 필요정보는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가령, 자동차가 있다면 운전능력이 필요하고, 은행을 이용한다면, 통장개설에서부터 펀드투자, 보험상품에 대한 판단 능력과 지식도 필요하다. 육아를 한다면, 아이에 대한 상식과 육아지식, 간단한 의학지식도 있어야 한다. 여행을 한다면, 해당 지역에 대한 정보를 파악해야 한다. 즉,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회 속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와 그 행위에 관련된 보조적 지식, 판단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지식과 판단능력은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고대, 중세, 근대, 현대에 따라 달라지게 되는 셈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지식과 능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정보화 사회라 불리는 현대에도 과거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아니 오히려 더 늘어났다. 그런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은 파편화될 수 밖에 없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들이, 혹은 개인의 욕망들이 늘어나고, 개개인들은 그것들을 따라가기에도 벅차다. TMI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것처럼, 너무나도 많은 정보들이 흘러들어오고, 개인들은 그 정보를 가려내고, 처리하는데 급급할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침묵이 동조라고 욕할 수 있을까.

 

'동조 - 남의 주장에 자신의 의견을 일치시키거나, 보조를 맞춤' 이라고 국어사전에 표기되어 있는 적혀 있는 것처럼 정말 '의견을 일치시킨 것'이고, '보조를 맞췄다'고 할 수 있을까.

 

애초에 한 개인이 '모든 문제'에 대해서 알 수 있을까. 알지 못하는데, 무관심한데, 그들 보고 동조자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아프리카나 수단의 아이들이 굶어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언론의 광고를 통해 어렴풋이 알 뿐이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죽어가는지 알지 못한다. 지금 필자가 살아숨는 동안에도 지구촌 어디가에서는 생명체가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범위를 줄여서 필자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서울의 어느 구(區)에서 굶어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문제를 보살피지 않았기에 해당 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기아문제의 동조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설령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생존을 위해 외면한 것에 대해서 동조자라고 욕할 수 있을까. 멀리갈 것도 없이 대한민국만 봐도 빈곤, 기아, 질병, 주거문제 등이 많다. 그런 모든 문제들을 생각하지 않고, 개인의 삶에 치중하는 사람들에게 동조자라며 욕할 수 있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가령, 이웃집 할머니가 가난해서 밥도 잘 못 먹어 사망했다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처지인 이웃에게 할머니를 외면했다고 비판할 수 있을까. 혹은 이웃이 구청에 신고하고, 일하러 갔더니 할머니가 사망했다고 한다면, 그 이웃을 욕할 수 있을까. 여기서 갑론을박이 또 벌어질 것이다. '정도'의 문제니까. 필자가 극단적 예를 들긴 했지만, 그런 것이다.

 

개인은 연대를 이루고, 무리짓고 살아가지만, 그 본질은 개인의 삶을 위한 행위다. 개인의 삶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연대와 집단행위인 것이다. 애초에 [ 개개인은 개개인의 인지능력 한계까지에서만 사회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 그렇기에 개인의 삶 속에서 각자 인지능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사회적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그 개인들의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적극적인 사회문제 해결에 나설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개인들의 삶이 공유돼서 연대되고는 것이고 집단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연대와 집단행위를 개인의 '선택'으로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즉 못하는 경우도 있고, 안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이들을 향해 침묵은 동조라며, 욕할 수 있을까.

플라톤이나 마틴 뉘물러처럼 '네가 행동하지 않으면 네 개인의 삶이 파괴될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 있어보인다. 하지만 마틴 루터 킹처럼 너희의 침묵은 '악'이라고 말하는 것은 임팩트는 있을지언정 이것이 연대를 하자는 것인지, 싸우자는 것인지 헷갈리게 만들 여지가 있다.

 

방관도 죄다. 침묵도 동조다. 라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그렇게 몰아감으로써 악인으로 낙인을 찍어 연대를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비열한 행위가 아닐까 생각하는 바이다.


물론 필자 든 예시말고도 나올 예시는 많다.

학교 폭력이 발생했는데, 같은 교실 내 친구들이 모른 척 한다던가... 이런 경우는 그들의 삶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도 외면한 셈이니까(그전에 처벌이 잘 이루어지지도 않고, 고발자 신원을 보장해주지도 못하는 시스템이 문제겠지만). 조직 내 내부고발을 했는데, 따돌림을 당한다던가..... 피해자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믿었던 친구들이, 동료들이 모른 척하는 그런 현실. 그것을 넘어서 따돌리는 행위.(따돌리는 행위를 한 시점부터 이는 분명한 가해자다.) 결국 피해자에게 있어서 방관자나 괴롭힌 놈은 똑같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단지 행위가 하나 더 추가 되었느냐 안 되었느냐 차이일뿐.



과연 침묵은 동조이며, 암묵적 동의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