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존실/잡념들-생각정리

까칠남녀 논란에 대한 추가 설명글에 관한 필자 생각

어둠속검은고양이 2017. 11. 22. 13:00

요즘 모 프로그램에서 모 교수의 발언으로 시끄럽다.

그 분이 최근에 페북에 추가 설명글을 올리셨다.

방송을 직접 본 적도 없으니, 필자가 뭐라 왈가왈부하기엔 그렇다.


그 분의 추가 설명글을 읽으면서 든 생각을 여기에 적어본다.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서는 그럴수도 있다는 생각이지만, 동의되어질 수 없는 부분도 분명히 존재한다.


'13세 소년은 정복자라는 것으로 둔갑되는 문화적 맥락이 존재한다'고 이라는 말을 들먹이셨는데, 이게 참 그렇다. 인문학의 단점과도 같은데, 문화적 맥락이라고 어떻게 증명할 수가 있는가. 인문학에서 말하는 '사회적 분위기', '거시적 관점', '문화적 맥락' 등등... 이 단어들 솔직히 말해서 계량화하여 측정하기 어려운 단어들이다. 그렇기에 이런 단어를 씀에 있어서 조작적 정의를 통한 간접적 조사가 우선 되어야 한다. 아무데서나 막 가져다 쓰는 단어 아니다. 이러니 '인문학이 말장난'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정복자'라는 소리를 하는 마초적 인간들이 존재한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문화적'인가? 라고 질문했을 때, 이에 대한 대답은 여러가지일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부분을 함부로 '문화적 맥락'으로 단정짓는 것은 피했어야 한다. 단순히 사회적 맥락이 '존재'한다 라고 말할 것 같으면, 나도 충분히 말할 수 있다. 살인자가 존재한다. 강도가 존재한다. 정신이상자가 존재한다. 이런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학문적 가치를 전혀 지니고 있지 못한다.


로리/쇼타 컨셉과 소아성애자를 구분짓고 논의하시는 부분은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모 교수께서도 말했다시피, 금지할 사항은 아니지만,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로리/쇼타 컨셉에 대해서 사회적 의미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똑같이 비판받을 여지가 있는 것이다. 사회적 의미가 다르다고 해서, 비판받을 수도 있는 로리 컨셉과는 달리, 쇼타 컨셉은 괜찮다고 인정해줘야 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사회적 의미가 차이가 있다는 것이, 그 취향을 존중받아야 된다는 '당위성'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사람들이 비판하는 이유는 당위적 측면에서 비판하는 것이다. (까고 싶어서 까는 사람도 많겠지만...) 하지만 교수는 당위적 측면의 비판을 '사회적 의미', '사회적 맥락'이라는 단어로 모호하게 넘어가려 하고 있다. 연구자의 관점에서 사회적 의미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것은 좋으나, 그것을 당위적 측면에서 옹호하는 듯한 발언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이다. 


추가적으로, 교수께서 올린 추가 설명글을 읽어보면, 당연하겠지만 대전제가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이 대전제를 깔고 가는 이상, 로리/쇼타 컨셉에 대한 사회적 의미에 대한 분석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대전제에 대해서도 여전히 논란이 많다. 대전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교수의 추가 설명글은 그저 말도 안되는 어거지를 부리는 것으로 될 것이다. 필자가 보기엔 로리타 컨셉에 대한 분석에는 어느 정도 수긍이 가나, 쇼타 컨셉에 대한 분석은 이미 결과를 내려놓고 짜 맞추는 것같이 보일 뿐이다.


또한, 필자 생각은 소아성애자 말고, 로리/쇼타 '컨셉'에 대해서는 개개인의 판타지적 취향선까지로만 보기 때문에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행위는 당연히 처벌받아야 할 것이고, 공공연한 언급은 충분히 타인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p.s

개인적으로, 모든 인간을 남성/여성으로 나누고, 성(sex)에 대한 부분으로 권력을 나누는 것에 대 대한 페미니즘 시각도 이제는 변해야 된다고 본다. 성이 아닌, 젠더로 접근을 하고 있고, 권력에 대한 정의도 바뀌고 있지만, 여전히 페미니즘 밑바닥에는 남성/여성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가 신화처럼 남아 있다. 역사는 변해왔고, 권력에 대한 관계도 변해왔고, 변해가고 있는 추세다. 그렇기에 이러한 전제에 대한 논의부터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추후 페미니즘은 외면받게 될 것이다. 현재 이퀄리즘 운동이 그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