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적으로 불안한 사람은 의존할 사람을 찾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자.
사람을 만날 땐 경제적 지출도 있지만, 개개인의 정신적, 육체적 지출도 있다. 집에서 편히 쉬고 싶은 사람은 기꺼이 밖에 나가 움직여야 하며, 상대방의 상태나 기분 등을 일정 부분 맞춰줘야 한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들끼리 만난다면 이 부분은 서로 맞추기가 매우 수월하다. (성격차이가 큰 경우 빼고)
하지만 어느 한 쪽이 그렇지 못한 경우는 어떤가. 과거 필자가 사람과의 관계가 끊기는 이유는 경제적 문제 그 자체라기 보단 경제적인 지출로 인해 선택권이 한쪽으로 기울게 되기 때문이라 말한 적이 있다. 마찬가지다. 한쪽이 육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면 우리는 당연히 그 사람을 배려 - 맞춰줘야만 한다. 이건 '불편한 사람을 맞춰주는게 그렇게 못마땅하냐?'와 같은 인간미나 도덕적 당위성과 별개로 선택권의 제한 혹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추가적인 지출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도덕적으로 옳다는 일이, 인간미 넘치는 일이 현실에서 자원적 제약을 넘어서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인간의 활동은 모두 자원적, 현실적 제약이 존재한다. 결국 한쪽이 정신적으로 불안하다는 것은 만남에 있어서 다른 한 쪽이 맞춰줘야 하는 수고로움이 더 커진다는 걸 의미하고, 그건 그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내할 만한 이유가 다른 한쪽에 있다는 걸 의미한다. 가령, 가족 구성원, 오랜된 친구, 연인과 같은 내적 친밀도에서부터 외모나 돈, 매력과 같은 그 사람의 외적인 부분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불안한 - 불안정하던 사람이 그만한 다른 매력이 없는데, 그런 수고로움을 들인다는 것은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의미다. 이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끼리에서도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다. 서로를 스캔하고 성격,외모, 지적 수준, 자산, 능력 등을 재가면서 아니다 싶으면 손절하는 마당에 정신적으로 불안한 - 불안정하던 사람과 만남이라고 다를까.
결국 앞서 말한대로 그러한 단점(수고로움을 들여야 하는 정도)을 넘어설만큼 다른 장점이 없는데 만난다는 것은 둘 중 하나다. 정신적으로 불안한 - 불안정하던 사람에게 무언가 꿍꿍이가 있거나, 혹은 정신적으로 불안한 - 불안정하던 사람과 만나는 쪽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갈만큼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과 비슷한 급(?)의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결국 사람은 끼리끼리 모이게 된다는 말이 그것이다.
.......유독 불행에 휘말리는 사람이 있다.
분명 그건 자연재해다. 우린 자연재해를 입은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 허나 자연재해를 같이 맞아줄 사람은 없다. 자연재해를 보며 자신은 안 당하도록 정비하지. 그렇기에 인연에서 자꾸만 이상하게 얽히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자신을 되돌아봐야만 한다. 자연재해는 오직 자력으로만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인이 먼저 바로서야 관계도 정상적으로 시작할 수가 있다. '시작'이다.
많은 이들이 굳이 불행에 휘말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관계의 시작은 자신이 온전한 한 사람일 때 성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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