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써두었던 주제를 이제야 꺼내본다.
바로 차별에 관한 도덕적 관점과 이익이다.
대게 차별이라는 것과 도덕이라는 것은 꽤나 오래된 사회적 논쟁이다. 차별은 도덕적으로 나빠요. 도덕적으로 나쁜 것은 하면 안돼요. 뭐 이런 것들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생각들 - 논쟁들이 사회 속에서 일어남에 있어서 단어의 경계선 - 정의부터가 불분명한 채로 시작된다는 것이다. 차별을 어디까지를 차별로 볼 것인지 경계선을 짓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경계선이 분명치 않으면 저마다 다른 기준으로 차별이다 아니다 이야기를 할 것이고, 그러한 기준이 합의 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도덕적 싸움은 집단적 독백의 현장으로서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것이기 때문이다. 토론은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함이지, 집단적 독백을 하고자 함이 아니니까. 그런데 과연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어디까지 차별이고, 어디까지 차별이 아닌지 명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문명은 분명하게 판단되는 정확한 정의들 위에서 세워졌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문명을 이루는 근간들은 상당부분 불분명한 것이 많다. 흔히들 말하는 '문과'에 해당하는 것들이 그렇다. 여튼 간에 어론이나 매체에서는 자극적인 보도와 조회수를 위해 차별이라는 단어를 과장해서 쓰거나 확대해석하여 쓰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예전에 차별에 관한 글을 쓰면서 차별에 대해 개인적 신념이나 외모, 종교, 언어, 인종, 성별, 국적, 성 정체성 등을 이유로 부당하게 대우하거나 정치, 경졔, 사회적으로 평등권을 침해하는 행위라 쓴 적이 있다. 그 때 그 글에서도 지적했듯이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양식이 평등권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해서 차별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을까.
대체적으로 언론, 매체에서 쓰는 차별은 매우 넓은 의미의 차별이다. 애초에 평등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 내리고 접근할 것인가도 문제다. 내가 A라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B라는 사람에게 인사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것이 평등함에 어긋나는 것인가. 이것이 '인사한다는 태도에 있어서 평등함'에 위배된다면, 나는 B를 차별한 사람이 될 것이지만, 애초에 인사한다는 태도에 평등함이라는 것을 적용시킬 수 있는가. 모두에게 똑같은 손동작과 똑같은 목소리 톤으로, 크기로 안녕!이라고 말하면 평등한 것이고, 목소리 톤이 달라지면 평등하지 않는 것인가. 매우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밖에 없다. '사람은 모두에게 평등해야 한다' 라는 도덕적 대전제에 관해 모든 이들이 동의한다고 치더라도, 사람을 향한 태도에 평등이라는 개념을 어디까지 적용시킬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다. 인사하는 태도가 평등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평등권을 침해하지 않는 것이므로 차별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A는 아시아인이라서 안녕!하고 인사했지만, B는 흑인이라서 인사를 안했다고 해보자. 이것은 차별인가. 이것은 누가 봐도 차별이라고 말할 것이다. 인종을 이유로 인사한다는 사회적 태도에 차이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바빠서 A에게만 인사를 한 것은 차별이 아니고, 인종을 이유로 A에게만 인사를 한 것은 차별이라면, 과연 A에게만 인사를 한 것 자체는 차별일까. 전자든 후자든 A에게만 인사한 것은 똑같은데 말이다. 여기서 언론은 바로 후자로 걸고 넘어진다. '00씨, B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A에게만 인사를 건네....차별주의자.' 이런식으로 말이다. 일단 차별이라는 단어를 이곳저곳에 마음껏 써재끼고 본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매우 폭넓은 경우의 차별까지 담아내려하고, 차별은 나빠요! 하면 안돼요!라는 절대적 신화와도 같은 도덕적 대전제를 깔고서 진행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차별이라는 단어는 넓게 쓰려면 얼마든지 넓게 쓸 수 있는 단어다. 꼭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평등권을 침해하지 않더라도, 인사하는 태도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히 차별이냐 아니냐 이야기가 오갈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본론적으로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로서, 한 아이가 온전한 성인으로 성장한다는 그 아이의 모든 주변 환경 영향을 받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면 부모들은 그 아이에게 미칠 모든 주변 환경을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만들어내려고 할 것이다. 맹모삼천지교라든지 유유상종이라든지 이런 단어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미래에 닥칠 지도 모를 위험한 가능성을 사전에 대비하는 것은 어떨까. 그것도 과연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위험성을 대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지혜로운 것이라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주거의 문제로 끌고 가보자. 예전에 떠들썩 했던 신문기사 중에 아이들이 사는 곳에 따라 서로 배척하면서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주거지에 대한 차별을 배우고 자란다는 기사가 있었다. 그에 관해 필자도 글을 한편 쓰기도 했었다. 그 땐 차별이 나쁜 걸 알지만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썼었다.
자 이제 이 글에서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보고자 한다. 사람이 사람을 배척하는 것은 차별인가. 왕따나 괴롭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차별이라고 수긍할 것이지만, 집단적으로 배척하는 따돌림이 아니라, 그냥 1:1로 서로 대화도 안하고 어울리지도 않는 것은 차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감정이 있는 이상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생겨날 수 밖에 없으며, 그러한 호불호에 따라 태도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냥 그 사람이 싫어서 대화도 안 나누고, 어울리지도 않겠다는데, 그것이 과연 차별로 볼 수 있느냐다. 예를 들어 폭력적인 아이가 있어서, 폭력적인 아이와 대화도 안하고 어울리지도 않는 것은 차별인가. 반대로 인종 때문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차별인가. 그렇다면 재산의 정도에 따라 어울리지 않는 것은 어떤가. 사람들은 대부분 첫 번째 경우 합리적인 이유 - 폭력성 때문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고 말할 테지만, 두 번째, 인종이나 재산의 정도에 따라 어울리지 않는 것은 차별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는 대해 사람들이 구분짓는 것은 명확한데, 첫 번째는 개인의 특성 - 본질적 특성이 반영되었고, 두 번째는 개인의 특성과는 무관한, 선천적인, 그 사람의 본질과는 관계가 없는 특성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들을 미래에 닥칠 어떠한 위험적 가능성에 대비한 것으로 치환해보면 어떨까. B 아파트에 사는 아이가 폭력성이 강해서 A 아파트에 사는 아이가 다치거나 심부름꾼이 될 수도 있으니 어울리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재산이 정도에 따라 가정환경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 어울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어떤가.
가난한 것은 위험한 것인가. 부자는 안 위험한가. 부에 따라 사람의 위험정도가 달라지는가. 확실히 말해서 그것은 명확한 상관관계가 없다. 수 많은 사회적 연구가 이루어지지만 영향이 있을지언정 절대적이거나 명확하지 않고, 또 어떤 식으로 측정하느냐에 따라 결괏값이 달라지기도 한다. 애초에 싹수 노란 놈은 그 사람이 부자든 빈자든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하지만 수 많은 부부싸움 - 가정환경들이 재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가난 - 재산에 따라 가정환경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이야기를 더 진행해보자면, 가정환경에 문제가 있어서 해당 아이도 문제를 지니고 있을 '가능성' 때문에 어울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차별인가.
이에 대해서 사람들은 저마다 의견이 달라질 것이다. 애초에 불분명한 '가능성' 하나만 가지고서 사람을 배척하는 것은 차별이라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필자가 앞서 말했듯이 혹시 모를 가능성 때문에 예방하는 것이니 차별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며, 괴롭히거나 왕따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울리지 않는 것은 단순한 개인적 행동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즉 어디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차별이냐 아니냐 의견이 분분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 차별의 정의 - 개인적 신념이나 외모, 종교, 언어, 인종, 성별, 국적, 성 정체성 등을 이유로 부당하게 대우하거나 정치, 경졔, 사회적으로 평등권을 침해하는 행위 가 분명하게 내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별을 현실적인 행동양식에 맞춰 더 넓은 의미로 확대해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혹여 정의대로 딱 맞춰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차별의 정의에 쓰인 단어들 - 평등권이나 부당한 대우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하기에 앞서 쓴 차별의 정의 조차 명확하다 말하기 애매하다 할 수 있다.
애초에 빈자들을 혹시 모를 미래의 위험이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위험천만한 생각이지만, 일단 그 문제점을 제쳐두고서라도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사람이 위험에 대비하는 자세의 일환으로 아이들이 어울리지 못하게 한 것이라면 그 사람들에게 우린 뭐라 밀할 수 있을까. 그릇된 신념에 의한 차별? 오 그렇다. 그릇된 신념에 의한 차별이라 명하면 적절할듯 싶다. 위험을 예방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이 차별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아니다. 마치 장발장이 배가 고파 빵을 훔친 것처럼 말이다. 장발장이 빵을 가져가는 행위는 훔쳤다는 범죄행위지만, 한편으로는 궁지에 몰린 사람이 배가 고파 훔칠 수 밖에 없었다는 명분을 지닌다. 마찬가지다. 차별을 차별이라 명하는 것과 위험을 예방하기 위한 행동은 하나의 행동에 들어있지만 별개다. 하지만 위험을 예방하기 위한다는 명분이 그것이 차별이냐 아니냐 의견을 갈리게 만든다. 마치 장발장이 훔쳤다는 행위를 사람들이 용서해주냐 마느냐 갈리는 것처럼. 특히나, 장발장이 저지른 것처럼 명확한 불법이 아니라, 이처럼 불분명한 경계선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 행위라면 더욱 그렇다.
애초에 이 문단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폭력성이 있어서 어울리지 않는 것과 인종이나 재산 때문에 어울리지 않은 것은 겉보기엔 알 수 없다. A 아파트에 사는 아이보고 B 아파트에 사는 아이와 어울리지 말라고 했을 때, 근거가 재산이 되었든, 인종이 되었든, 그 아이의 폭력성이 되었든 남아있는 것은 'A 아파트'에 사는 아이가 'B 아파트'에 사는 아이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뿐이다. 결국 이러한 행위들의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차별-차별이 아닌 행위를 했을 뿐이고, 그 의도는 당사자가 아닌 이상 알 수 없으며, 그 행위의 당사자들이 아닌 제 3 자들은 겉으로만 보고서 차별이다, 아니다로 판단하며 싸우게 될 뿐이다.
이렇듯 차별에 대해 도덕적 관점으로 따지는 것은 개개인들의 생각의 지점, 가치관, 신념을 확인하는데 그칠 뿐 그 행위를 도덕적으로 교화시킨다거나 교정시킨다거나 하는데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다만 서로의 신념이나 가치관을 확인하고 공유함으로써 한 목소리를 내어 해당 행위를 법으로 강제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이익의 관점에서 행동하는 인간 양식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자연스레 바뀔 수 있도록 유도해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일시적인 방편에 불과하다.
차별이 일어나는 것은 그러한 행동에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이러한 이익은 법으로 강제함으로써 손익계산을 바꿀 수 있다.
허나 손익을 인위적으로 바꿨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감화된 행동약식을 이끌어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해서 마냥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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