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익명이지만 페이스북도 가끔씩 한다.
최근에 '페미니즘'이야기가 왈가왈부 되는 페이스북에 들어가 보았다.
홍대선 작가분께서 유아인 배우를 비판하는 다른 작가분의 태도에 대해 일침하는 내용이었다.
대다수는 그 작가분에 대해 옹호하는 입장이었으나, 이에 대해 비판하는 분들이 있어서 눈여겨 보았다.
......그리고 난 보았다.
페미니즘을 한다는 분이 페미니즘이, 어째서 환영받지 못하고, 페미니즘에 대해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를.... 물론 그 한 사람이 사이버에서 일어나는 페미니즘을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서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페미니즘에 접근하시는 분들도 많으리라 생각하여 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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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가 생길까봐서 한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오래전에 필자 썼던 글에서도 밝혔다시피, 필자는 페미니즘의 대전제에는 동의하는 편이다.
그리고 자칭 페미니즘이라 주장하는 메갈리아 커뮤니티도 일단은 '페미니즘의 대전제'를 가져다 쓰고 있으니, 페미니즘의 한 부분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물론 이부분에 대해서 이견이 있으신 분들도 계시리라 믿는다. 페미니즘과 메갈리아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다 같은 페미니즘이며, 페미니즘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페미니즘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지는 않는 사람으로서, 페미니즘의 대전제에 대해서만 동의를 하고, 방식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필자에게 있어서 페미니즘의 대전제를 이용해먹기 위해 가져다 쓰든, 진실로 그사회운동을 추구하기 위해 쓰든, 어느 용도로 쓸려는지 대한 의도는 상관없다.
대전제에 대한 참/거짓은 이용하려는 의도와는 별개니까.
예를 들자면 이렇다.
흑인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법을 고치자고 주장하는 흑인A가 있고, 흑인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백인을 모조리 몰살시키자고 주장하는 흑인B가 있다고 하자. 필자는 흑인A,B 둘의 대전제인 '흑인 인권을 보호하자'라는 것에는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흑인 A의 말에 공감을 표할 것이며, 지지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흑인B의 대전제에는 동의하지만, 그의 방식(백인을 몰살시키자는 것)에는 반대를 할 것이고. 그 방식을 위한 무수히 많은 논리적 포장에 반대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페미니즘이 어째서 환영받지 못하는가'에 대한 답은 메갈리아의 방식에 대해서 비판하는 글이며, 메갈리아에 동의하지 않는 페미니스트 분들에게는 당연한 소리이자, 사회운동하는데 주의해야할 점이라 생각하시면 될 것이다.
한줄로 요약하자면, 과격한 페미니즘 혹은 메갈리아의 페미니스트가 배척을 당하는 원인을 짚어간다고 보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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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끝으로,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생각을 완전히 정리하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씁쓸할 뿐이다.
내가 배웠던 페미니즘은 그것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대학교에서 학회를 할 때 배웠던 것은 문득 지나칠 수도 있는 언어들, 법, 제도 속에, '여성 차별적인, 여성을 배려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었고, 우리는 그 부분에 대해 서로 발제를 해보며 많은 논의를 했었다. 그렇다. 인간의 제도, 언어, 문화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모두의 입맛에 맞출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 끝없이 논의하고, 계속 수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법이다. 개인 소개는 여기까지 하고.
한분은 '페미니즘이 여성의 목소리'라는 대전제를 무시하니까, 자꾸 남자들이 윤리적 문제로 귀결된다고 말을 하고 계셨다. 그리고 윤리는 감각적인 문제라는 말과 함께. 또한, 페미니즘을 옳고/그르다고 판별하는 권력 자체를 반대한다고 하셨다.
윤리는 감각적인 문제가 맞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목소리도 맞다.
페미니즘을 옳다/그르다 판별하려는 권력을 반대하는 것도 이해하고, '남자가 인정하는 페미니즘'이 필요없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원론적으로만 그렇다.
사상을 글로만 이해하면 이렇게 될까 싶다.
필자가 생각하기엔, 페미니즘 운동은 사회운동이고, 사회운동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현실의 남자/여자 라는 사회 구성원들을 설득하여,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자는 것이다.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동을 촉구하고, 설득하는 것의 밑바탕에는 '사람 대 사람'이라는 '휴머니티'가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설득과 대화와 상호 교류는 이것이 기본 아닌가.
이 사실을 자각한다면, 윤리는 감각적인 문제라고만 치부해버릴 수 없는 것이 된다.
윤리는 사회 구성원들의 행동을 강제하는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사회 구성원들끼리의 공유를 통해 교류를 촉진하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그것이 예의라는 것이다. 대화를 할 때, 윤리는 감각상의 문제일 뿐, 니가 말하는 윤리는 내 기준에 알맞지 않다고, 예의를 갖추지도 않고,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면서,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안 듣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자신의 말만을 무조건적으로 들어주길 바라는 보살을 바라는 것인가. 예의를 차릴 생각이 없으면 대화를 왜 하는가. 왜 사회구성원들에게 변화를 촉구하는가.
여성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 '여성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여자를 절대 이해못할 '한남'/여자가 반반씩 섞인 사회'의 윤리를 무시해도 된다는 정당성을 부여해주진 않는다. '여성의 목소리'는 사회적 윤리를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
남자들이 자꾸 '윤리'적 문제로 귀결하는 것은, '여성의 목소리'라서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서 대화를 하고, 설득하려면 최소한의 것을 지키라는 것이다. 남자들이 지적하는 것은 '사회운동'인 페미니즘인 이상, '사회운동'으로서 지켜야할 최소한의 윤리적인 것을 지키라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의 절반인 남성들이 사회운동으로서 '동의'를 표할 수 있게 말이다. 남성이 우위적인 권력을 가지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동의'할 수 있는, 그리고 같이 할 수 있는 사회운동을 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들은 전혀 싸그리 무시된 채, '오빠가 허락하는 페미니즘'은 필요없다고 치부해버리곤 한다. 빅엿을 날리면서 웃는 사람에게, 웃으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빅엿만은 날리지 말라고 하는 것을 보고, 애네들은 웃는 것마저도 허락받고 웃으라고 한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물론 이 글에서 가리키는 남성들은 필자처럼 페미니즘의 목표에는 동의하지만 운동방식으로 인해 비판적인 남성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싸움 붙여놓고 팝콘각을 즐기는 그런 사람들이나, 페미니즘 자체에 대해서 거부하는 남성들은 논외의 대상이다.
결론
페미니즘은 사회운동이고, 사회운동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현실에서의 대화, 사회운동, 활동은 모두 상호간의 교류가 필요하다.
이러한 상호 교류에서 윤리/예의는 어느 정도 필요한 것들이다.
사회운동은 절반은 남자이고 절반은 여자인 사회구성원들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사회운동인 '페미니즘'은 설득을 통해 사회 구성원 모두가 납득하고 '동의'할 수 있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야 하나고 생각한다.
사회 구성원의 절반인 남성을 배제하고, '여성의 목소리'를 내고 말거면 대체 왜 사회운동을 하나. IS가 했던 것처럼, 남자들 다 죽여버리고, 여성들만의 사회를 만들면 되지. 사회운동은 미우나 고우나 나머지 사회구성원들과 함께 가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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