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존실/잡념들-생각정리

가난에서 가난으로

어둠속검은고양이 2022. 12. 25. 14:14


가난에서 가난으로.

가난하지 않은 자가 가난을 입에 담는다는 것이 어쩌면 오만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를 향해 가난을 팔아 돈을 번다고 돌을 던지곤 한다. 마치 가난을 빼앗기기라도 하는 듯이. 그럼에도 누군가는 가난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가난은 사유재산과 함께 인류가 나타난 이래로 있어 왔던 것이며, 지금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가난은 가난한 자만의 전유물이 되어선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볼드모트처럼 금기시되는 단어처럼 변해가고 있을 뿐이다.

오래전에 필자는 '가난이 패션인가'라는 글을 통해 상품화되어 가는 가난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가난은 어떻게 바뀌어 왔는가. 조세희 작가분이 쓴 <난.쏘.공>의 배경이 되는 1970년대 경제개발에서부터 1997년 외환위기까지.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가난은 어떻게 바뀌어 왔을까.

여기 좋은 신문 기사가 있어서 부분 발췌를 해왔다. 그리고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 사실 이 글은 21년 5월 중에 썼던 글이다. '언젠가 올려야지' 해놓고 노트북에 저장해 둔 채 잊어버렸다. 우연히 재발견하여 다시금 글을 퇴고한 후 올린다. 과거에 썼던 글을 발견하니 감회가 새롭다. 

[세 종류의 가난 이야기가 있다. 첫 번째는 선과 악, 정의와 타락이 대립하던 시기의 가난이다. 다수가 가난했지만 그들 사이는 진흙처럼 끈끈했다. 건너편에는 선명한 악의 실체가 존재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조세희, 1978, 이하 〈난쏘공〉)이다. 이후 20년, 가난에서 물기가 말라갔다. 가난이란 누구의 잘못인지를 물어 싸우기보다 어서 빠져나가야 할 대상이 되었다. 궁핍할지언정 단단하게 뭉쳐 있던 가족과 마을공동체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IMF 외환위기 직후 ‘우리 모두의 가난’이 ‘나의 가난’으로 변하는 길목에서 〈괭이부리말 아이들〉(김중미, 창비, 2000)이 나왔다. 또 한 번 20년이 흘렀다. 가난은 이제 바삭바삭해졌다. 우리 모두의 가난은 이제 사라졌다. 각개전투 모래알 같은 각자의 가난만 남았다. 1970년대 후반 〈난쏘공〉을 읽고 1990년대 후반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쓴 김중미 작가(58)는 2010년대 후반 다시 가난에 대해 말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곁에 있다는 것〉(창비, 2021)이다.]

- 부분 참조 : 시사in, 가난을 혐오하는 가난의 '곁에 있다는 것' 변진경 기자.

 * 개인적으로 이 기사를 찾아서 읽어보라고 권해보고 싶다.
회사를 다니면서, 스스로 돈을 벌게 되면서, 사회 속 부품이 되어가면서 과거와 같은 생각과 고민을 내려놓은 지 오래지만, 그래도 이런 글들은 생각을 다시금 잡게 만든다.

무수히 많은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한강의 기적 속에서 대다수는 가난했지만 우리 모두 그 고통과 서러움을 알았기에 외롭지 않았다. 부정과 부패, 희생이 뒤섞인 야만의 시대 속에서도 서로의 상처를 알았기에 서로를 보듬고, 또 공동의 적을 마주하며, 조금은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향해 발버둥 칠 수 있었다. 덕분에 한강의 기적처럼 가난은 이윽고 서서히 사라져 갔고, 도심에는 번쩍이는 상가건물과 아파트가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가난은 여전히 남아 있었으니, 그 가난은 이제 변두리로, 달동네로, 시민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쫓겨났을 뿐이다. 그로부터 20년 후, 외환위기는 아파트 단지에, 대기업에, 앞날에 대한 희망 대신 가난에 대한 공포를 만들어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난을 피해 한강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 거대한 가난 앞에서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모든 이들이 가난을 벗어내려고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화제가 난 후에도 나무가 다시 자라고, 풀이 생겨나듯이 가난의 상흔들은 서서히 지워져 가기 시작했다. 오히려 위기를 기회삼아 더욱 크고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가난은 사람들 사이에 매울 수 없는 간극과 흉터를 만들어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삶은 풍요로워졌지만, 흉터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더욱 커졌다. 사람들 사이의 간극도 더욱 커져 버렸다. 이제 가난은 우리 모두의 일이 아니라, 각자가 이겨내야 할 몫으로만 남아있게 되었다. 아이들은 가난을 이제 교과서에서, 소설책에서만 접하게 되었고, 가난은 자취를 감췄다. 가난은 변두리로, 달동네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에, 누군가의 마음속에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낙인을 받는다. '그럴 이유가 있으니까, 가난하지.' '가난한 사람을 상대해보면 알게 돼. 부자들이 여유롭기 때문에 더 친절해.'와 같이, 이제 가난한 자들은 혐오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들의 삶에서 묻어 나오는 가난의 흔적을 '그래서 우리가 그걸 왜 이해해줘야 하지?'와 같은 짜증으로 바뀌어버렸다. 맞는 말이다. 그들의 언행이 왜 그런지 알겠는데, 그래서 그들을 이해해줘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이해해 줘야 할 이유, 공동체를 유지해야 할 이유가 사라져 버렸다. 70년대처럼 우리를 가난하게 만드는 거대한 악이나 적이 있는 것이 아닌, 가난은 이제 각자의 무능력으로만 남게 되었고, 각자가 알아서 해결해나가야 할 문제가 되어 버렸다. 오래전 썼던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영화처럼 2020년대엔 공공의 적은 없다.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 희망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순응하기 시작했고, 포기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살아가는데 간극은 커질 뿐이다. 해결책이 보이질 않는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 뿐이다. 현재를 유지하는 것이 다 일뿐 대한민국에 미래는 없다. 사회를 해체시키고, 공동체를 해체시켜버린 가난은 이제 대한민국을 해체시키고 있다. 가난이라는 거대한 악은 사라져 갔지만, 개개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스며든 가난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처럼 모두의 파멸로 이끌어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왜' 이해해줘야 하는지 물음에 답할 수가 없다.
이제 가난은 너의 입장이지, 내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기에.

공기는 매우 소중하지만, 숨 쉬는 것이 자연스럽기에 그 소중함을 모르듯, 모두가 사회의 부품으로서 역할을 하기에 사회가 돌아가지만, 사회에서 홀로 살아가는게 당연해진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 공동체를 잊어버렸고 오로지 혼자만 남았다. '왜?'라는 이해심을 잊어버린 우리는 앞으로도 이 물음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해심이 필요한 날,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땐,사회적 부품을 대체한 기계들만이 남아있을 것이고, 우리도 기계로 대체되고 말 것이다.

p.s
우리가 정치인만이 정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듯이 가난에 대해서, 환경 오염에 대해서, 노동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자격을 요구해선 안 된다.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기만이라며, 위선이라며, 낙인을 찍어서 특정한 누군가의 전유물로 만들어선 안 된다. 그러한 담론들이 특정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되는 순간부터, 그 담론은 더 이상 담론이 되지 못하고 잊혀진다. 가난이 우리 모두의 문제가 아닌 개개인의 문제가 되어 버렸듯이. 사회 문제에 누군가는 말해야 하고, 또 그것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을 입장이 다른 위선으로 백안시해선 안 된다. 어느 누구도 사회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 사회는 죽어버린 사회일 뿐이다.

* 다시 읽어보니 확실히 감회가 새롭다. 그리고 그 때 그 시절의 생각도. 지금의 생각도. 지금은 어떤 생각이 드나요? 하고 묻는다면, 난 아무 생각이 없다고 말하고 싶다. 될 대로 되라지 느낌? 각자도생 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였고, 내 삶을 더 무겁게 만들고 싶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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