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 뒤 해가 뜨는 날은 날씨가 무척 좋지요.
네, 오랜만이에요. 저번 편지에 이어 정말 오랜만에 편지를 쓰게 되네요. 중간에 몇몇 글을 쓰긴 했는데 개괄적으로만 써놓은 채 덮어 버렸어요. 글을 쓴다는 건 다듬고 수정하고 정리하는 작업의 반복이지요. 특히나 타인에게 비추는 글이라면요. 물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려는 목적만 있을지라도 글을 다듬어 정리하는 습관이 필요해요. 명확하게 표현한다는 것은 명확하게 정리되었다는 뜻이니까요. 우리가 글이나 그림으로 우리의 생각을 펼쳐놓는 이유지요. 바빴다고 핑계 댈 수는 없구요, 그냥 게을러졌어요. 물론 일도 하고, 생활은 제대로 하고 있어요. 그냥 이러니 저러니 살아가다 보니 글을 자꾸만 미루게 되더라구요. 그만큼 생각이 줄어드는 삶이 되어 가는 것 같기도 하구요. 생각 없이 사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나의 앞날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선택과 집중이지요. 제가 예전에 '자신의 삶에 충실하지 못한 자는 세상의 온갖 것에 관심을 갖는다'라고 썼던 글귀가 생각나네요. 어릴 땐 다양하게 이것저것 관심을 갖다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서서히 좁혀나가는 거지요. 인간관계도 그렇구요. 커리어나 학문도 그렇지요. 세상사가 다 그렇게 되어가는 것 같아요.
얼마 전에 라식 수술을 했어요. 스마일 라식이요. '안경쓰는 게 너무 불편해서', '안경을 벗으면 시력이 너무너무 안 좋아서'와 같은 이유는 아니구요. 그냥 이미지를 바꿔보고 싶어서요. 20년을 넘게 안경을 썼고, 이젠 안경이 너무도 익숙해서 자거나 샤워할 때도 자주 쓰고 있을 정도인데. 적응이 돼서 불편한 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라식 수술을 계속 망설였어요. 사람마다 반응이 너무 다르고, 부작용이 오면 어떡하나 싶어서. 수술의 목적이 미용 때문에 하는 건데 말이지요. 검사 결과는 수술에 매우 적합한 눈이라고 하더군요. 각막이 조금 두꺼운 편이고 교정을 위해 깎을 각막도 적은 편이라서 좋다구요. 추변 사람의 권유에 눈 검사만 한번 받아볼까 했다가 수술 예약까지 잡게 됐지요. 결과는 대성공이네요. 아픈 것도 없고, 불편한 것도 없고, 이물감도 없고, 이제 7일 차 되어가고 있는데 만족스러워요. 안경 쓰던 시력에 거의 근접하게 나오고 있구요. 하지만 간절함이 없어서 그런가, 적응이 되어서 그런가, 안경 벗고 다닌다는 사실이 정말 뛸 듯이 기쁘거나 하진 않네요.
이번에 눈 검사를 하면서 특별히 알게 된 사실이 있어요. 그것 때문에 제가 수술도 결정하게 된 것도 있구요. 제가 동공이 조금 크다고 하네요. 그래서 평소에도 빛번짐이 조금 있을 거라고, 수술하면 빛 번짐이 아무래도 조금 더 심해질 수는 있다구요. 지금은 수술 전이나 후나 빛 번짐 차이가 없는 듯한데, 놀랐어요. 빛 번짐이 전혀 없이 또렷하게 불빛이 보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요. 빛이 눈부신만큼 다들 조금씩 빛 번짐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말이지요. 빛 번짐에 적응이 된 감각 - 눈이라서 아무래도 수술 후 빛 번짐에 도 무던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아요. 감각적 수용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니까요. 수술을 생각하시는 분은 이거 조금 중요한 것 같아요. 내가 평소에 어떤 눈을 지니고 있고, 얼마큼 감각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지 아는 것 말이에요. 원래 안구가 건조한 편인데, 수술했다고 해서 건조증이 특히 심해졌다거나 그렇지도 않은 것 같네요. 결과적으론 대성공이고 만족스러운 편이네요. 인상은 확실히 안경을 벗은 게 낫네요. 호박에 줄 긋는 정도지만요.
얼마 전엔 혼자 시립 미술관을 갔다왔어요. 특별 전시회가 열린다고 해서요. 큰 기대를 하고 간 건 아니지만, 결론을 말하자면 조금 아쉬웠어요. 오래전 편지에 썼던 것 같기도 한데. 전 그림다운 그림을 좋아해요. 무엇이 그림 다움이냐고 묻는다면 참 대답하기 어려운 주제죠. 여기서 그림 다움이란 흔히들 말하는 '그냥 도구를 이용해서 기술적으로 잘 표현했다.' 정도로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어떤 그림이든 주제의식과 작가의 사상이 들어가기 마련이지만, 현대에 오면서부터 너무 난해해져서요. 감상하려면 공부를 하고 가야 할 지경이지요. 봐도 이해가 잘 안 되고..... 그래서 전 현대작품들의 전시회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냥 마음에 드는 것, 있는 그대로 보고 즐길 수 있는 그런 전시회가 좋지요. 뭐, 현대 작품도 있는 그대로 보고 즐기라고 하지만, 있는 그대로 볼 수도, 즐길 수도 없네요. 여튼 간에 난해해서 아쉬웠어요. 물론 갑작스럽게 간 탓도 있겠지만, 제대로 된 설명도 없고, 어떤 걸 어떻게 표현하고자 했는지 파악하기도 어려웠구요. 아는 만큼 보이는 분야는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어느 분야든 알아야 제대로 즐기게 되는데, 제대로 아는 데까지 도달하는 게 참 어렵네요. 그 어려움과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노력이구요. 아쉽게도 현대 미술에 대한 관심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아요. 전시회는 갈 테지만, 공부까지는 안 하는 정도?
저는 이렇제 잘 살아가고 있어요.
조금씩 더 나아지고, 소소하게 일상을 즐기면서.
오늘은 마지막 휴일이네요. 날씨도 좋은데 산책이라도 나가보는 건 어떨까요. 오랜만에 사람도 만나구요. 조금 있으면 나가고 싶어도 추워서 머뭇거리게 될 거에요. 우리 여름과 겨울 사이의 이 짤막한 가을을 즐겨봐요. 날씨만큼이나 평화로운 하루가 되길 바라며 편지를 마쳐요.
또 편지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