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영화

친절한 금자씨

어둠속검은고양이 2021. 8. 19. 00:38

친절한 금자씨
감독:박찬욱
장르:스릴러, 드라마, 누아르
개봉일:2005.7.29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시리즈 중에서 마지막을 장식한 영화, <친절한 금자씨>이다.
왼쪽은 유명한 영화 포스터고, 오른쪽은 아트하우스 박찬욱 관에 전시된 아트포스터로 인상 깊어서 같이 퍼왔다.

오래전 대학 수업 때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발표를 하기 위해 처음 보게 됐던 영화다. 그땐 그저 단순학 복수극을 발랄하게 그려낸 영화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보니 복수라는 것에 대해 많은 것을 담아내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 당시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도 하고. 오래전에 봤던 명작들을 다시 보는 것도 꽤나 쏠쏠한 재미를 준다.

<복수 3부작> 시리즈라는 말처럼 이 영화는 딸을 위해 거짓으로 자백하고 대신 감옥을 가게 된 금자(이영애)가 출소 후에 범인을 찾아가 복수를 한다는 내용이다. 그렇기에 잔인하고 폭력적인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또 그 영화의 주인공을 당시에 단아하고, 청순한 이미지의 상징이었던 이영애 씨가 연기하게 된 것은 독특하다. 그래서 포스터가 관객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더불어 이 영화를 통해 이영애 씨는 선한 역할을 맡던 기존의 이미지를 탈피할 수 있었다.

담담하게 보여주며 모든 판단을 관객에게 맡기는 다른 영화와는 달리 이 영화는 독특하게도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때에 따라선 적절한 설명을, 때론 금자의 속마음을 설명해주는 내레이션은 마치 오디오 소설을 관객들이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가져다준다. 내레이션과 더불어 경쾌한 ost까지도. 분명 영화 속 장면은 잔인한데, 담담히 말하는 내레이션과 경쾌한 ost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몰입감을 방해하지 않으니, 무언가 오묘한 느낌을 갖게 해 준다.

- 복수와 구원
이 영화의 키워드는 바로 복수와 복수를 통한 구원이다.
금자 씨는 범인 대신 영아 살해죄로 감옥에 들어간다. 비록 금자 씨가 협박에 못 이겨 거짓자백을 했음에도, 원모라는 영아를 직접적으로 살해하지 않았음에도, 본의 아니지만 범인을 감쌌다는 것만으로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녀는 살해당한 원모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출소 후 원모의 부모님을 찾아가 손가락을 자르며 사죄를 한다. 이런 일련의 행동들을 보아 그녀가 범인인 백 선생을 살해하려는 것은 그녀 자신의 원한도 있겠지만, 원모에 대한 죄책감이 원인으로서 더욱 크게 작용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처음 감옥에 들어왔을 때 울기만 했던 금자 씨가 친절하게 행동하면서, 13년 동안 감옥에서부터 철저하게 살인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으로 삶의 태도가 급격하게 변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감옥에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복수만이 그녀를 지탱해주는 삶이요, 엉망이 되어 버린 자신의 인생과 죄책감에서 구해줄 일종의 구원 의식인 셈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 복수를 단순하게 죽여버리고 끝! 이 아닌, 신성하고도 거룩한 구원의 의식을 치르듯이 했다. 이는 그녀가 굳이 복수를 간편한 현대식 총이 아닌, 감옥에서 조리법을 알게 된 구식 총으로 진행한 이유다. 그리고 그 총에 새겨 넣은 장식까지도.)

- 누가 피해자인가, 누가 복수할 수 있는가.
오래전 필자는 형벌과 범죄에 대해 글을 쓰면서 형벌에 대해 분노하던 이들과 함께 사이다패스를 언급한 적이 있다. 이 영화는 피해자의 유족들이 가해자에게 직접적인 형벌을 가한다는 점에서 이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든다. 분명 살해당한 피해자의 유족들도 피해자라 말할 수 있다. 그들 역시 피해를 입었기에 복수를 할 자격 정도는 있지 않을까. 그러나 직접적인 피해자는 역시 백 선생에게 살해당한 영아들이다. 용서해주는 것도, 그들을 벌하는 것도 오직 그들만이 할 자격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죽고 없다. 남은 것은 유족들 뿐이다. 이들의 슬픔과 분노는 대체 어떻게 해소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들의 슬픔과 분노를 일으킨 가해자에게 조금쯤은 형벌을 가할 권리가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 권리는 오직 유족들의 감정 해소에만 해당되는 일일뿐, 결코 살해당한 영아들을 위한 권리라 말할 수 없다. 피해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은 결국 핑계일 뿐이다. 금자 씨 역시 백 선생에 의해 피해를 당했던 만큼 어느 정도 복수할 권리는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녀만큼 그 복수가 간절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복수의 기회를 내려놓는다. 그녀는 자신이 거짓자백을 함으로써 추가적인 범행 발생으로 인해 생겨난 피해자의 유족들에게 그 기회를 넘긴다. 그녀는 유족들에게 가해자의 처분을 맡김으로써 복수 아닌 복수를 끝낸다. 백 선생 사망 후 그녀가 짓는 우는 듯한 웃는 표정은 후련하지 않다. 백 선생의 죽음만이 그녀의 유일한 구원이었을 텐데, 그녀는 여전히 구원받지 못했다. 만약 그녀가 직접 총으로 백 선생을 쏴 죽였더라면 그녀의 죄책감과 삶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을까. 우리는 알 수 없다. 단지 그녀가 아직도 구원받지 못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가해자에 대한 형벌을 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피해자만이 가질 수 있는 권리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이 권리를 피해자들로부터 뺏는다. 동일 범죄에 동일 형벌이라는 형평성을 이유로 말이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분명 피해자들만의 권리지만, 그러나 그 고무줄마냥 주관적 잣대인 그 권리를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살해당한 피해자를 제쳐두고서라도 간접적으로 피해당한 유족들이나 금자 씨의 복수는 과연 어디까지 행할 수 있는 것일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처럼 직접적으로 살해당한 영아들에게는 최소한 가해자를 직접적으로 죽일 수 있는 정도까지의 권리는 있을 거라 본다. 그러나 유족들은 과연 자식을 죽인 그 범인에 대해 어디까지 처벌할 권리가 있을까. 그들이 선택한 살해는 과연 정당한 권리였을까.

백 선생 사망 후 금자 씨는 원모의 영혼을 마주하고서 뭔가 말하려고 하지만, 원모는 그녀의 입을 막아 버린다. 그러나 그 행위는 '다 끝났다는 걸 알아. 아무 말하지 않아도 돼.'와 같은 따뜻한 위로가 아니다. 원모의 영혼은 백 선생이 찼던 재갈을 똑같이 금자 씨에게 채운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는 것처럼.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역시 금자 씨가 용서받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녀는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금자 씨가 원모를 살해한 백 선생을 죽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으니 그의 범죄를 도운 그녀는 정말 '이제 다 끝났어. 원모야.'라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없다. 이미 죽어버린 원모가 앞에 나타나 고맙다고, 용서한다고 말하기 전까진. 그런 그녀의 모습을 이 영화는 '그토록 원하던 영혼의 구원을 끝내 없지 못했다'며 내레이션을 통해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참 친절한 영화다.)

- 또 하나의 구원, 제니
그런 그녀에게 또 하나의 죄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딸을 버린 죄다. 백 선생이 금자 씨를 협박하기 위해 납치하고, 해외로 입양 보내 버린 그녀의 딸. 영화 친절한 금자 씨의 주된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백 선생에 대한 복수와 그 복수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노력한 금자 씨의 모습이지만, 그 사이에 숨겨져 있는 그녀의 딸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비록 그녀의 자의가 아니었을지라도, 금자 씨가 딸을 버린 것은 사실이다. 금자 씨가 복수를 하기 위해 총 쏘는 연습을 하러 딸과 함께 피크닉을 간 날, 그녀의 딸은 금자 씨에게 편지를 쓴다. 그리고 백 선생을 납치하기 직전에 금자 씨는 그녀의 딸이 쓴 편지를 읽게 된다. 그 편지에서 그녀의 딸, 제니는 '어렸을 때 당신을 찾아가 복수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당신을 죽이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당신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복수까진 몰라도,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해 달라.'라고 쓴다. 그 후에 백 선생의 입을 통해 알게 금자 씨의 모든 사연을 알게 된 제니는 금자 씨에게 새하얀 케이크를 들고 온다. 영화 첫 장면에서 전도사가 가져온 두부처럼. '두부를 먹고 새하얀 사람이 되세요'라고 말하던 전도사처럼 감옥을 갔다 온 사람들에겐 출소하는 날 두부를 먹인다. 그런데 그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피해자를 제외한 어느 누가 감히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죄를 사한다거나, 새하얀 사람이 되라고 두부를 먹일 수 있단 말인가. 영화 끝부분에서 제니가 들고 온 새하얀 케이크는 일종의 용서다. 딸을 버린 죄로부터 당신을 용서한다는 피해자 제니의 구원이다. 금자 씨는 원모의 용서를 받지 못했지만, 제니의 용서를 받았다.

처음에 볼 땐 그저 경쾌한 영화로만 생각했는데, 영화의 메타포를 생각하면서 보면 꽤나 재밌고 잘 만든 명작이라 생각한다.

p.s
이 영화는 여성의 서사를 그린 영화로도 유명하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 <올드보이>에서 여성 캐릭터들이 주연으로 활약하지 못하고 곁두리로 밀려나는 게 마음에 쓰였고, 오래전부터 여성 서사의 작품을 쓰고 싶었다고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p.s 2
감독이나 평론가들은 남성이나 여성, 캐릭터들의 서사를 신경 쓸지 모르겠으나, 단순한 관객이었던 필자의 눈엔 여성이니, 남성이니 그 캐릭터 비중이라든지, 서사가 많은 것이 의미가 있나 싶다. 남자든 여자든 그냥 주인공의 성별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그래도 <친절한 금자 씨>의 주인공이 남자로 나온다는 것이 상상이 가질 않는다. 여성 캐릭터들을 서사로 꽤 잘 만든 수작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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