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6월 13일자 경향신문에서 한 교수가 혹독한 비판을 했다.
한 TV 프로그램의 인문학 강좌에서 실수하여 사과하게 된 것을 기계로, 현재 인문학의 위치에 대해 되짚어 보는 것이었다. 그 교수는 '한국은 모든 것의 상품화가 가능한 사회로 전이되고 있는 듯하다.' 며 칼럼의 운을 뗐다. 내가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그 교수의 주장에 매우 공감이 가기 때문이었다.
요즘은 인문학 열풍이다. 그런데 그 인문학 열풍의 핵은 어딘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생각해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다.
- 아이폰. 스티븐 잡스. 성공. 인문학적 소양, 취업을 위한 스펙.
아이폰이 성공한 뒤로, 스티븐 잡스가 유명해진 뒤로, 한국에서는 한국기업의 문제점을 거론하며,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우습게도, 몇 년이 지난 지금, 대학교는 취업을 이유로 인문학과를 통폐합하고 있다. 기술적인 과를 집중 육성하겠다고 한다. 사담을 하자면, 대한민국은 이미 하나의 기업이라고 생각한다. 대학교에서는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을 맞춰서 뽑는 것이다. 여튼간에...)
현재 기업들이 원하는 인재상은 다시 바뀌었지만, 여전히 인문학 열풍은 불고 있다. 여기저기에서 강사를 초청해서 인문학에 대한 강연이 펼쳐지고 있다. 그 강연을 펼치는 곳은 백화점이나 마트, 기업이다. 인문학적 소양을 알아야 한다면서.,,, 칼럼에 기고한 교수 역시도 이윤 확대의 가치를 최고의 목표로 내걸고 있는 전형적인 백화점과 기업에서 인문학이 소비되는 것이 흥미롭다며, 이는 인문학 열풍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일부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매우 동의하는 바이다.
기업과 백화점 등에서 불고 있는 인문학 열풍은 '인문학 열풍'이 아니다. 그저 소비자들의 소비욕구를 자극하기 위한 판촉행사, '유인 마케팅'일 뿐이다.
(* 강연하러 다니시는 분들께서는 매우 불쾌할 만한 발언임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소비자 관점에서도 인문학적 강연 청취자, 인문학적 책을 가지고 다님으로써, 자신을 좀 더 세련되고, 옛지있는 사람이 되는 듯한 그 시선을 즐기는 것이다. 이는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 자존감을 낮게 만드는 사회적 구조의 문제와도 맥락이 닿아있다.
(이에 대한 논의는 나중에 글을 쓰려고 한다. 적어도 필자는 사회적 구조가 대한민국 사회 전체를 자존감을 낮제 만드는 것이라 판단하고 있다.)
(*이 발언 역시도, 진지하게 인문학을 생각해보는 이들에게 무례한 발언임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칼럼을 일부 인용해본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자 하는 ‘상품화의 욕구’에 의하여 유지된다. ‘인문학’이라는 바다와 같은 심오한 영역이, 미디어를 통해서 그 끝이 쉽게 드러나는 간편한 일회용 상품으로 포장되어 소비되고 있다.
인문학적 ‘지식’은 인문학적 성찰의 세 가지 영역들이라고 할 수 있는 나, 타자,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하여 복합적인 이해를 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관점을 형성하고, 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다층적인 방식으로 이 세계에 개입하도록 하는 것이다. 단편적 ‘정보’와 인문학적 ‘지식’의 차이이다. 소위 인문학적 소양이란 치열한 ‘왜’로부터 출발한다. ‘왜’를 묻는다는 것은 비판적 사유와 분석을 필요로 한다. 근대를 지난 현대 인문학의 다양한 분야들을 아우르는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질문은 해답보다 심오하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인문학적 사유에 들어서는 사람들이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은 간결함과 명쾌함이 아닌, 불확실성과 모호성이다. 인문학적 사유는 이전의 익숙한 이해세계를 뒤흔드는 내면적 불편함을 경험하게 한다. 한국의 대중매체에서 소비되고 있는 인문학의 상품화가 결정적으로 놓치고 있는 점이다.'
필자는 이 부분이 칼럼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교수는 인문학과 단편적 지식과의 차이를 언급하며, 현재 기업과 백화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인문학 열풍은 단지 상품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누군가는 물어볼 것이다.
"왜 인문학은 상품화가 되면 안되는가? 이 역시도 하나의 욕구로서 인정해 줄 수는 없는가?" 하고 말이다. 이렇듯 필자가 가정한 누군가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이 바로 인문학적 지식의 출발점이다. 이 질문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보고, 답변해보고, 그 답변에 대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논리정연한 뒷받침을 가져올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인문학이다.
사실 필자 입장에서도 인문학의 상품화는 있을 수 있고, 괜찮다고 여긴다.
인문학적 지식이 단편적인 것 조차도 없어서, 인문학적 사고를 할 수 없는 이들에게는 주입식 교육이나마, 정보 그 자체로서 접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토양이 있어야지 새싹이 자랄 수 있는 것이다.
허나, 이 인문학적 상품화는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다.
칼럼에 기고한 것처럼, 인문학이라는 강연은 온갖 해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함께 사유하면서 그 인문학적 지식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길 위해서 주입되기 때문이다. 일종의 암기다. 허나, 인문학적 소양은 인문학적 지식에 다다르는 과정에 있는 것이지, 지식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a는 b다. 와 같은 명확하게 해답으로 이루어지는 강연은 어떻게 보면, 사유하는 과정 자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 특히나, '바쁜 현대인들'에게 해답을 내려주는 인문학적 강연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모범답안이 되어 버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러한 집단적 ‘인문학의 상품화’를 통해서, 진정한 인문학적 정신은 근원적으로 외면되고 왜곡된다.' 고 칼럼 기고자는 인문학을 소비하는 이들에게 외침을 가하고 있다.
인문학이라고 해서 무거울 필요없다. 가벼워도 된다.
인문학적 사유의 토양을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인문학의 상품화도 괜찮다.
허나, 그 토양은 바쁜 현대인이 곱씹으며 인문학적 새싹을 키우기에는 독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독한 토양이다.
'기록보존실 > 신문사설, 나의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베네수엘라 윈도우10 사태를 열심히 까대는 이들에게 던지는 한 마디 (0) | 2017.01.03 |
---|---|
시사in 원본이 사라지면 미러링도 사라진다에 대한 필자의 견해 (0) | 2016.08.18 |
"일베나 메갈이나”를 말하는 당신은..... 에 대한 필자의 일부 비판글 (1) | 2016.08.08 |
‘미러링’의 정당성과 한계, 그리고 메갈리아...에 대한 필자 생각 (0) | 2016.08.08 |
메갈에는 없는 남성혐오 라는 기사에 대한 일부 반박 (0) | 2016.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