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저마다 이해의 허용 범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허용 범위는 일종의 선(line)과도 같은데, 이 선을 넘느냐 마느냐가 이해의 가능여부를 가른다. 단적으로 말해서 이정도까지는 이해가 '가능' 한데, 이 이상은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의 가능 여부는 매우 매우 복합적이다.
이해라는 것이 머리로 이해한 것과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다르듯, 이해의 작용도 상황과 분야, 대상의 지적수준, 심적인 수용력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매우 복잡한 과학에 대해 이야기 한다고 했을 때, 이것에 대한 이해는 발화자의 전달 능력, 수화자의 지적수준에 따라 달라질 것이고, 이것에 대한 이해능력은 '머리로 하는 이해'를 가리킬 것이다. 물이 100도에서 기화가 된다는 사실은 객관적인 관찰의 사실로서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지, 마음으로 기화한다는 것에 감동을 느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행동에 대한 이해는 마음과 머리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모함을 당해서 억울한 마음에 상대방을 때렸다고 했을 때, 첫번째로 '모함을 당했다는 사실'을 이해할 지적 능력이 필요하고, 두번째로는 얼마나 억울할까!와 같은 추론 능력과 공감능력이 필요할 것이다. 만약에 모함당했다는 상황이라는 것을 선행해서 이해하지 못한다면 억울하다는 추론도, 공감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행동과 관련된 이해라는 말을 할 땐 머리로 하는 이해와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 두 가지 모두를 가리키는데, 앞서 말했듯이 이는 매우 복합적이며 유기적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모함당한 사람이 폭력을 쓸 수도 있다고 여길 수도 있다. 폭력이라는 것이 불법적인 것을 떠나서 말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폭력이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해선 안될 행위라고 여기기 때문에 폭력을 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단적으로 본다면 언뜻 한명은 이해심이 넓고, 한명은 이해심이 좁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함당해 폭력을 쓸 수도 있다고 여긴 - 이해심 넓어 보이는 사람이 성(sexsual)에 대한 문제에는 매우 매우 엄격해서 클럽에 남녀가 만나는 것을 이해 못하는 반면에 폭력에는 절대 반대하던 사람이 오히려 개방적으로 남녀가 만나는 것은 자유로워야지 하고 이해할 수도 있다.
즉, 이해는 개인의 선(line)에 따라 다르지만, 그 개개인의 선(line) 또한 사람의 전체적인 이해도를 나타내는 선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개인 안에 있는 선(line)은 분야에 따라, 양심에 따라, 도덕적 기준에 따라 여러가지 선들(lines)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선을 하나씩 넘어갈 때마다 머리로든, 심적으로든 이해 불가능 상태에 도달하게 되고 거부 반응이 일어날 것이다.
결론적으로 글을 요약하자면 사람마다 이해의 허용 범위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허용의 범위에는 도덕성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이해심이 넓다'라는 말은 사람이 참 관대하고, 좋아 보이는, 선(good)의 느낌을 가지고, '이해심이 좁다'는 말은 아집이 넘치고, 타인의 말은 귓등으로 듣지 않는 그런 나쁜(bad)모습으로 비춰진다. 그러나 넓다/좁다는 범위의 정도만을 가리킬 뿐 도덕성과는 전혀 별개다. 오히려 요즘엔 넓은 이해심을 가진 사람보고 호구라고 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해심에 대한 것을 도덕적으로 접근하는 성향이 강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늘 타인에 대해 좀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이는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할 거야! LOVE & PEACE ! 라고 외쳐댄다. 물론 상대방에 대한 이해도가 더 넓어진다면 사소한 다툼이 줄어들게 될 것이긴 하다. 그러나 이러한 도덕적 접근은 '이해에 대한 강요'로 이어지고 있다.
'내가 왜 상대방을 이해해야만 하는가?'라고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이해해야만 하는 당위가 있을까. 예를 들어 상대방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나에게 농담을 했으나, 그로 인해 나의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고 생각해보자. 상대방의 의도가 어쨌든 간에 상대방의 농담이 나의 선(line)을 넘었는데 왜 선한 의도로 했다고 해서 이해를 해주고 넘어가줘야 하는가. 물론 항의를 할 지, 꾹 참고 넘어갈 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결과적으로 상대방과 내가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반응은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선(line)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향한 의도가 아니라, 내가 지닌 이해 허용의 선(line)이고, 그 선을 침범했느냐 안 했느냐가 이해가능 여부를 결정짓고, 나의 행동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물론 이 이해 가능 여부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섞여 있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 이해가 안되는 일이 비일비재 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러한 이해에 관한 일에 대해 우리는 늘 타인으로부터 검열을 받으려고 한다. 내가 화를 내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 아니면 너무 예민한 건 아닌지, 이해심이 좁은 것은 아닌지 평가받고 싶어한다. '난 사실 이해심이 넓은 사람인데, 어쩔 수 없이 화를 낸 거다'라는 지지를 받으면서 자신의 감정에 확신을 갖길 바란다. 이러한 것은 당연히 '우리는 늘 타인에 대해 이해해야 해. 타인에 대해 이해하려 들지 않는 것은 나쁜 사람이야'와 같은 도덕적 신화와 같은 구속에 의해 발생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즉. 이해심에 대해 도덕성을 부여하며 이해심에 관해 당위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개개인의 행동들이 본인들 각자가 지니고 있는 이해허용의 선(line)으로부터 이루어진다는 메카니즘을 생각한다면, 불가능한 전제를 가지고 주장하는 셈이다.
물론 개개인마다 지니고 있는 이해에 관한 선(line)이 새로운 경험이나 지적 수준의 변화로 인해 달라질 수는 있다. 또한 감정 역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고유한 감정의 영역은 컴퓨터처럼 프로그래밍처럼 바로 인위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변화 역시 매우 미미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늘 이해심을 넓게 가져야 하고, 상대방의 의도도 고려하는 역지사지의 자세로 살아야 한다고 강요받지만, 그것이 가능한 인간은 실제로 없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상대방의 의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내 안의 이해 가능 여부의 선(line)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존중이라는 단어는 이해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저 내 이해심에 거슬리면 눈감는 것이고, 내 이해심에 들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이해를 가장한 존중하자는 말은 그저 입으로 내는 소리에 불과할 뿐, 실제로 그렇게 굴러가지 않다는 것은 돌아가는 현실이 잘 보여준다.
*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이해하려는 행위-생각에 생각을 더하는 행위는 긍정적이라고 본다. 어찌됐든 바로 감정적으로 나가는 것보단 다툼이 일어날 여지를 줄여주는 건 분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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