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pd수첩의 연예인들의 부동산 투자에 관한 영상을 보며, 그들의 행태에 대해 법적으로 뭐라할 수는 없지만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있지 않나 성토하는 방송을 본 적이 있다.
이에 든 의문은 자신이 지닌 가치와 자산, 그리고 법적 분석과 빠른 정보를 통해 발빠르게 투자하는 것이 과연 '나쁜' 것인가? 였다. 우리는 왜 모든 것을 도덕적 옳고 그름으로 따지려 드는가. 모든 거래의 협상의 기본은 자신의 강점을 세우고, 상대방의 약점을 붙잡고 흥정하는 것이다. 상대의 손해가 나의 이익으로 돌아오는 판단에서 도덕적 잣대가 들어갈 이유가 없다. 다만 당사자들의 상황이나 처지를 개인적으로 이해해주거나 참작해줄 순 있다. 그냥 인간적으로. 그러나 그것은 개개인의 성격, 인간미, 감정과 관련된 것이지, 사회에서 말하는 도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과연 우린 자본주의 사회에서 윤리적 소비, 윤리적 생산을 어디까지 보고 어디까지 인정해야만 하는가. 대체 윤리란 무엇인가. 가난한 세입자들을 배려하는 것은 과연 윤리인가. 나보다 못한 이들을 챙기는 것이 과연 윤리인가. 어째서 우리는 상대적 약자로 보이는 이들을 거래할 때 배려해주어야만 하고, 그것을 가리켜 윤리적이라고 말하는가. 합법적인 틀 안에서라면 어떤 상대와 어떻게 거래를 하든 간에 우린 도덕적 잣대를 내밀며 비난할 순 없다. 모든 이들은 개인의 욕망을 위해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행동엔 늘 패자와 승자가 생긴다. 누구는 크게 손해볼 것이고, 누군가는 크게 이득을 볼 것이다. 자본주의의 합리적 경제활동엔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도덕심이나 인간미도 없다. 그저 승자와 패자로 나뉘는 비정함만 있을 뿐. 물론 내가 패자가 될 수도 있다. 승자일 땐 기쁨을 만끽하겠지만, 패자일 땐 눈물을 쏟을 것이다. 내가 승자일 땐, 나도 패자가 될 수 있었음을 염두해야 할 것이다.
어릴 땐 착하게 산다는 것이, 도덕적으로 산다는 것이, 사회에 주어진대로 순응하고 살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살아보니 사회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좀 더 적극적으로 찾고, 고민하고, 활동해서 내 밥그릇은 내가 챙겨야 살아갈 수 있다. 주어진 대로 사는 것은 도태된다. 물론 적극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승리를 보장하진 않는다. 언제고 실패할 수도 있고, 영원히 도태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어진 대로 살면 서서히 도태된다. 경쟁 사회니까.
숨막히는 경쟁 사회에서 어깨에 힘 좀 빼고 서로 여유를 갖고 살고 싶은데 어렵다. 모두가 변해야 하는 조별 과제 같은 것이기에.
상대를 외면하는, 비정하고 합리적인 소시오패스가 성공하는 것이 눈에 띌수록 우린 그들의 생활방식을 선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현재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배려는 사라지고, 공동체도 사라지고 있다. 도덕심은 갖다 버린지 오래다. 흔히들 도덕적이라 포장되는 '나만의 손해'만이 존재하는 배려를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없기 때문이다. 갈수록 삶이 팍팍해져 거래 간에 있어서 개인의 손해에 대해 여유가 사라져 버린 상황에서, 타인을 위해 일부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려는 선한 마음을 이용해먹으려는 사람들에 대해 아무런 제재가 없다.
(불법을 차치하고서라도)공감이나 감정에 기반한 도덕심을 외면하는 소시오패스를 향해선 비윤리적이다, 도덕적이지 못하다 온갖 비난을 하면서, 감정이나 공감에 흔들리는 사람들이 손해보는 것에 대해선 또 당연시하며, 그들에게 윤리적이다, 도덕적이다 포장질만 할 뿐, 그것을 촉진하는 시스템은 거의 없다. 사회적 눈치로, 압박으로 떼운다. 그리고 그러한 압박이 흔히 일어나는 까닭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합리적 의사 결정이나 자기 이익 추구엔 결코 인간미나 도덕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당연한 것에 대한 수긍이 없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사회를 원한다면 그러한 시스템을 구축하든가. 그게 아니라면 자본주의의 본질을 수긍하고 받아들이든가. 한국 사회는 이도저도 아닌 모양새다. 도덕적인 걸로 왈가왈부는 잘하면서 정작 그 사회를 위한 시스템 구축은 없다.
비정하지만 합리적인 소시오패스들이 한국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것은 남들이 뭐라 하든 공감과 감정에 기반한 도덕심은 철저하게 외면하되, 자신에게 손해로 돌아오는 것이 확실한 법적인 부분(불법으로 규정된)에서만큼은 선을 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시스템은 법의 외적인 부분에 있어서 개개인의 도덕심과 윤리에 크게 의존하여 사회적인 눈치로 떼우고 있으며, (물론 그 최소한의 법 조차도 공정하지 못한 것은 덤이다.) 자신에게 직접적인 손해가 오지 않는 그 사회적 눈치나 비난을 신경쓰지 않는 소시오패스가 성공하기에 좋은 구조로 되어 있다. 반대로 사회적 비난이나 눈치를 못 견디는 보통 사람들은 조심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그렇기에 소수의 소시오패스는 성공하고, 보통 사람들이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해줌으로써 약간의 손해를 보고, 그들과 거래하는 약자들은 큰 이익을 얻는 행위는 한 가지 흔한 거래 행위 그 이상이 되질 못한다. 의미없는 제 3자의 칭찬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것이 사회적인 어떠한 의미도 생성되지 못한다. 이렇듯 개인의 손해와 이익만이 존재하게 되는 거래로 끝날 헤프닝을 어느 사회가 사람들에게 권장할 수 있단 말인가. 단지 그렇게 하도록 미친듯이 눈치를 줘서 억지로 맞춰놓고 있는 것 뿐이다. 이것은 도덕적이고, 이것은 비윤리적이고, 이것은 이래서 문제고, 저것은 저래서 문제고, 그러나 그 눈치로 인한 결과물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개개인들을 깨달아가는 것이다. 사회적 비난이나 눈치는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것들을 무시한, 철저히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고 행동한 소시오패스들이 성공하고, 그 성공이 그들의 모든 행동을 합리화 해 준다는 것을 말이다. 사회나 방송에서 외치는 도덕적 윤리적 당위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합리적 의사 결정이나 자기 이익 추구엔 결코 인간미나 도덕심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에 살면서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는데서 비롯된 근거없는 강요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종교적 내세관이 무너진 현대엔 이제 어떤 문제에 대해 단순히 개개인의 도덕이나 윤리에 온전히 맡기기 어렵게 됐다. 공동체, 배려, 윤리, 도덕, 양심 따위에 의존한 한국 사회의 시스템은 근래에 들어 한계에 부딪쳤음에도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으며, 여전히 그냥 도덕적이지 않아서 문제라는 식의 사회적 분위기만 강압을 계속되고 있다. 현실의 결과물은 전혀 다르게 나오고 있는데.
비교하기 쉽도록 발달된 인터넷과 경쟁을 촉구하는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정착되어 가는 개인주의와 자본주의는 소시오패스를 양성하는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그리고 우린 이제 그 소시오패스들의 행동을 더 이상 도덕적 잣대로 옳고, 그름으로 따지는 것을 그만둬야만 한다. 그 행위는 앞서 말한 대로 어떠한 사회적 개선을 가져오지 못하고, 단순한 개인적 도덕심을 비난하고 마는 것으로 끝날 것이기에. 그리고 그 행위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성공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하지 못한 채, 근거조차 부실해져버린 단순한 강요에 불과하기에. 이제 우린 도덕심이 어떻고 저떻고 기대며 이야기하지 말고 사회 시스템적으로 어떤 이득이 생기며, 어떤 부작용이 생기는지, 어떻게 막거나 개선할지 미래를 향한 생산적 토론 방식으로 다가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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