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감독 : 허진호
장르 : 멜로
개봉일 : 2001.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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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으면 문득
그리운 날의 기억.
아직까지도 마음이 저려 오는 건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
이 노래처럼 눈을 감으면 봄날의 사랑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나요? 저는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어요.
영화를 가만히 보다 보니 그 사람도 정말 은수 같은 사람이었던 것 같네요. 제멋대로 왔다가 제멋대로 가는, 자유롭게 사랑을 하던 사람이었지요. 제멋대로인 점이 닮았어요. 뭐, 다 지난 이야기예요. 그저 한 때 봄날의 사랑 같았던 사람이죠. 문득 이 노래를 듣다보면 떠오르곤 해요.
그럼, 리뷰 시작합니다.
지금 시선에서 이 영화를 보면 상우(남자 주인공, 유지태)의 모습이 답답하기도 하고 촌스럽다.
그건 20대의 순수하고도 풋풋했던 사랑을 담아낸 까닭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세월과 사랑에 대한 시선도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낀다. 아니, 내가 그만큼 나이를 먹어서 그런 것일까. 그럼에도 과거와 달리 사랑에 대한 접근법이 달라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2000년대 초반은 죽고 못 사니, 네가 죽니, 내가 죽니, 순정이니, 뭐니, 그런 느낌이었는데, 요즘은 담백함이 대세다. 질척거림은 없어졌고, 내 사랑은 내가 원하는 대로 쟁취해야할 대상이며, 굳이 아쉬워할 필요없이 안 맞으면 쿨하게 갈 길 가자는 느낌이랄까.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라면 먹을래요?"
"버스 하고 여자는 떠나면 잡는 게 아니란다."
이와 같은 명대사를 남긴 이 영화는 젊은 날의 남성과 여성의 만남과 이별의 일상을 담아내고 있다.
어느 겨울날 상우(남자 주인공, 유지태)는 자연의 소리를 채집하기 위해 찾아온 은수(여자 주인공, 이영애)를 만나게 되고, 녹음 여행을 떠나게 되면서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봄을 지나 여름이 오면서 둘의 관계는 조금씩 어긋나게 되고, 결국 헤어지게 된다. 이별을 위해 마음을 정리한 은수와는 달리 상우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왜 하필 라면이었을까.
물만 끓이면 금방 내올 수 있는 차와는 달리 라면은 조금은 더 번거로운 작업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식사와는 다르게 가볍게 먹을 수 있는 한 끼다. 차는 마시면 훌훌 털어버리고 갈 수 있다. 그것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라면은 그렇지 않다. 라면을 끓이고, 식사하고, 설거지까지, 그것은 좀 더 번거로운 과정과 시간을 요구한다. 그러나 가볍다. 그것은 한 끼의 제대로 된 식사만큼 무겁지 않다. 그것은 빠르게 사랑에 빠져든 상우와 은수의 사랑을 상징하는 듯하다.
은수에 빠져든 상우는 멋대가리 없는 고백을 한다. 김치를 담글 줄 아냐고 물으며 가족들에게 인사하러 가자는 상우의 말에, 은수는 김치를 담글 줄 모른다며 애써 회피한다. 상우는 자신이 김치를 대신 담가준다며 애써 은수를 붙잡아보지만, 라면처럼 빠르고 간편하게 이루어졌던 사랑은 라면처럼 금방 식어간다.
이 장면은 정말 단순하게 보면 멋대가리 없는 남자의 고백과 이에 실망한 여자의 모습을 담아낸 것뿐이지만, 그 이상의 것을 담아내고 있다. 바로 사랑의 속도다. 은수는 연애를 생각했고, 결혼을 아직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우는 결혼까지 생각했다. 한창 사람에 불이 붙었을 때, 사랑에 대한 진도를 서로 맞춘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진도를 빼려고 하는 상대방과 달리 이것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사람은 마치 사랑에 대한 거절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내가 좋아서 결혼까지 하자는데, 부담을 느끼는 내가 과연 이 사람을 사랑하긴 하는 걸까?' 이런 부담감 속에서 은수는 음악 평론가에게 흔들리는 자신을 보게 되고, 술에 잔뜩 취한 채 들어와 상우에게 안기며 울음을 터트린다.
그러나 전에 무덤을 가리키며 "우리도 나중에 저렇게 둘이 묻힐까?"라고 말하는 그녀를 떠올려보면 그녀가 결혼에 대한 생각을 안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어쩌면 상우의 집안사정 때문에 망설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잘생기고 순수한 상우는 분명 사랑스럽고 연애하기 좋은 상대다. 그러나 허름한 시골집에서 치매걸린 할머니와 홀아버지와 같이 살고 그의 처지를 생각하면 조심스럽다. "엄마, 엄마 하고 울고 난 후로 아버지가 손찌검 한 번 한 적 없어."라든지, "김치 맛있게 담글 줄 알아? 아버지가 여자친구 있으면 데려오라던데...." 하는 상우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이 그 곳에 매어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조바심이 날 법도 하다.
아주 짧은 장면이었지만, 그 장면은 연애와 결혼 그 사이의 수 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다. 그 장면 이후로 상우와 은수의 관계는 변하기 시작한다. 은수는 상우와의 관계를 이어가지만 태도는 분명히 전과 달리 변해있다. 당분간 시간을 갖자는 그녀는 끝내 상우에게 헤어지자고 말한다.
p.s
은수의 이 망설임이, 연애와 결혼 사이의 괴리감과 현실감들이 이해가지만, 얼마 전에 리뷰했던 '퐁네프의 여인들'을 생각해보면 기분이 묘하다.연애는 연애고 결혼은 결혼이라고 말하는 시대다. 결혼은 현실이라고 말한다. 한국의 드라마, 한국의 영화들, 그리고 한국의 현실들을 생각해보면 그 말에 충분히 동의가 되고, 이해가 되지만, 사람들은 또 한편으로는 퐁네프의 여인들처럼 현실이고 뭐고 주변이 안 보일 정도로 사랑에 퐁당 빠져들고 싶어하는 걸 보면 모순적이다. 연애든 결혼이든 현실과 이상은 하늘과 땅만큼 멀어져 있다.
할머니의 치매와 상우의 미련
영화 속에서 상우의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다. 할머니를 아껴주던 할아버지는 바람이 났고 지금은 돌아가시고 없다. 그런 할아버지를 할머니는 계속 기다리고만 있다. 은수와 헤어지고 나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힘들어하던 상우는 결국 이별을 받아들이며 엉엉 운다. 그런 그에게 할머니는 "힘들지? 버스하고 여자는 떠나면 잡는 게 아니란다."라고 위로를 건넨다. 그리고 얼마 뒤 할머니는 곱게 차려입은 뒤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상우가 끝내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받아들였듯이, 할아버지와의 이별을 치매로 인해 받아들이지 못하던 할머니가 제정신으로 돌아와 상우를 위로하는 장면은 할머니 역시 할아버지와의 이별을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별을 받아들였으니 이 세상을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 아닐까. 상우가 이별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할머니의 치매를 같은 선상에 배치한 감독의 의도가 엿보인다.
세월이 흐른 뒤, 은수는 상처가 난 손을 머리보다 높에 들고서 털어내는 자신의 모습에서 문득 상우의 존재를 느끼게 되고 그에게 연락한다.
그리고 상우와 은수는 다시 만났다. 그 때 그 시절과 달라진 도시에, 세련된 모습으로. '라면 먹을래요?'라고 우회적으로 말하던 그녀는 이제 없다.
대신 '오늘 같이 있을까?'라고 먼저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그녀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상우의 모습은 그대로다.
변함없는 상우의 모습 속에서 그녀는 무엇을 보았을까. 지난 날의 순수했던 사랑? 그때 그 시절?
그것을 잡고 싶어 하기라도 한 듯 그녀는 상우를 붙잡지만, 상우는 은수를 거절한 채 발길을 돌린다.
오늘 날의 느낌으로 보면 안될 영화 중 하나.
아날로그적 감성, 유명 배우들의 젊은 날을 보고 싶은 분께 추천.
젊은 날의 풋풋하고도 순수했던 사랑의 감정선을 느껴보고 싶은 분께도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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