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무채색, 무미건조한 맛, 그리고 노력하는 메타몽

어둠속검은고양이 2018. 12. 30. 02:18

요즘 날씨가 많이 추워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를 때는 날씨부터 이야기를 꺼내게 된다.

해야 할 말이 없으면, 하고 싶은 말이 없으면 굳이 글을 쓸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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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쓰던 글도, 무언가 몰두하던 일도, 둔감해져 간다.

포기하는 것과는 또 다르게 내려놓게 되는 것은 삶 자체를 둔감하게 만든다.


포기하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사람은 냉소적으로 변하고, 타인과 외부의 것들에 멸시와 경멸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보는 법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삶에 뿌리깊게 배어들어 지워지질 않는다. 한쪽으로 치우친 것을 평형으로 맞추기 위해 다른 한쪽에 가중치를 두듯이 더 많은 역작용을 요구한다. 그렇다곤 하지만, 치우쳐진 것이 꼭 문제라 생각할 필요가 있나. 그냥 그것이 하나의 삶으로 남게 되는 거지. 다만 외부에 있는 관객으로서 평형된 것이 이상적이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다.


반면에 내려놓게 되는 것은 또 다르다. 그것은 내려'놓다'는 것도 아니고, 내려'놓게 되는' 것이다. 그건 일종의 선택과 집중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할 수 있게 될 것들과 앞으로도 할 수 없는 것들. 살면서, 살아가면서 자연스레 내려놓게 되는 것들은 내 삶에서 퇴장하고, 분명한 것들만이 내 삶에 남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이 내 삶의 색을 결정짓게 될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은 둔감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내 시야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 많아지고, 그것들에 대해선 자연스레 둔감해진다. 내 삶에서 퇴장될 것들 따위야 내 알 바인가.


그것은 나이를 먹어가며 SNS를 신경쓰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어르신들이 인터넷을 신경쓰지 않거나, 잘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인터넷에서 떠들든 말든, 내 삶에 지장도 없고, 내 눈에 보이지도 않고, 당장 내 눈 앞에는 업무와, 집안일과, 경제적 문제가 있는데, 신경쓸 이유도, 여유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인터넷에서 굳이 나를 표현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나를 표현한다'는 것에는 타인의 시선이 어느 정도 담겨 있다.

한창 때야 열심히 나를 표현하고 그것을 외부에 알리는데 치중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는 내 삶을 타인에게 알리기 위해 구태여 손가락 하나 더 움직이는 수고로움과 사진 고르는 시간 낭비를 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비슷한 이유일까.

아니면 단순한 게으름일까.


글 쓸 이유도, 생각도 없어졌다. 아니면 한순간의 휴식기일까. 어떤 의미로든 간에, 하고 싶은 말도, 해야 할 말도 사라지고, 막연하게 글 쓰고 싶다는 생각도 사라졌다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쓰다면 한없이 길게 써지는 것이 또 글이다.


p.s.

어르신들이 SNS를 신경쓰지 않는다고 했으나, 그것이 회사생활, 사회생활과 연계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런 이유로 정치적인 문제에서의 실제 행동력은 윗 세대들이 더 높다. 학연이든, 지연이든 간에 직접적으로 내 삶과 연관된 공동체를 챙기는 세대들과 개인주의 사회에서 자라, 공동체라곤 같은 학교출신이 전부인 세대들의 차이다. 이들에게 보다 넓은 공동체적 관심은 인터넷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인터넷이 삶의 기반에 되는 정도가 다르니, 관심도와 집중도도 다를 수 밖에 없다. 인터넷 여론과 현실적 여론이 다른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는 모두 '나의 뇌피셜'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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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와서, 얼마전에 메모해두었던 것들을 간단한 글로 쓰려고 마음 먹었다.

그런데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감흥이 사라졌다. 그것은 그만큼 그 글이 별로였다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점차 둔감해져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인터넷을 켰으나, 쓸 말이 없어져서 손가락만 뱅뱅 돌린다. 그럴 때면, 날씨 얘기나 사랑 얘기, 삶 얘기 등의 구태의연한 것들로 글을 시작하곤 한다. 그러다보면 또 어느새 길게 글을 쓰게 된다. 감흥은 없지만 쓰려던 글은 써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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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바라는 내 모습.

내가 바라는 내 모습.


사실, 스스로에게 바라는 모습은 없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잘생긴 외모, 멋진 몸매 같은 것들은 타인 내게 바라는 것들이지, 내가 바라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것은 단지 타인의 시선이나 관심을 내게 이끌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제 모습에 만족하느냐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습니다. 관심밖의 영역이거든요. 


'감히' 이런 글을 쓰는 제가 해당 수단을 갖춘 것은 아닙니다. 분명 가져본 사람과 가져보지 못한 사람의 불평은 다를 것입니다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제가 되고 싶은 모습은 딱히 없다는 것이지, 갖춘다는 것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글을 쓰고 보니 딱 하나 있긴 합니다. 소나무처럼 늘 한결같은 사람입니다. 허나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단지 가치관, 유지한다는 측면에서의 하나의 성품에 불과할 뿐입니다.


분명히, 저는 노예적이고, 타성적인 인간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저에게 바라는 인간상을 제시해줄 타인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비록 이상적인 모습이 될 수는 없겠지만, 해당 모습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을 할테니까요. 분명히 그것은 안 좋은 생활방식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타율적이고, 사람이 아닌 인형에 가깝습니다.


과거에 저는 그대가 바라는 내 모습으로 변하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습니다.

분명히 그것은 진정한 제 모습이 아니었을테지요.


이것 때문에,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싸웁니다.

나는 내 모습으로 있고 싶은데, 타인이 간섭하고, 타인의 마음대로 바꾸려 들다보니 언성이 높아집니다. 흔히들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자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전 제가 변하기 위해 노력했을 당시에 한번도 다툰 적이 없었고, 불만도 없었습니다.

식단관리나, 운동을 하는 습관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번거로움이 생기는 것일 뿐, 내 성격이나 가치관 자체에 해당하는 근본을 바꾸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오히려 건강하게 변해가는 것이 기뻤고, 상대방에게 맞출 수 있다는 것이 기뻤습니다.


제 성품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애써 넘긴 것인지, 아니면 상관이 없는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부분도 간섭했으면 분명히 마찰음이 생겼을 것이라 추측해봅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대로 저는 상대방이 원하는대로 순순히 바뀌었을거라 생각도 해봅니다. 아직,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대가 저를 바라는 모습대로 바꾸려 들었다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요?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자는 그런 '정론적'인 사랑은 아닐 테지만, 그대의 그 모습과 저의 순종적인 모습은 잘 맞아떨어졌을 생각해봅니다. 정론적인 사랑이 아니어도 잘 어울러진다면 그것도 사랑의 한 형태로 남았을 것입니다.


저는 무채색이며, 무미건조한 맛입니다.

지니고 있는 기질은 있으니, 명도정도는 지니고 있는 무채색이며, 무언가 우려낸 정도의 물맛은 될 것입니다. 포켓몬으로 비유하자면, 메타몽 정도겠으나 그정도 능력은 없는 듯합니다.


트레이너가 없는 노력하는 메타몽으로 애써 포장하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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