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를 업으로 삼는 사람은 항상 선택당하는 위치에 있다.
높은 학식과 창조 능력으로 선각자라는 단상위에 올라섰던 이들은 이제 지상으로 끄집어 내려졌다.
원래 대중문화를 생산한다는 것에 자격이라는 것이 존재했던가.
다만 기술적, 시대적 한계로 인해 특정 미디어와 매체에 대한 접근 기화가 일종의 자격으로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대중문화를 업으로 삼는 이들은 항상 간택당해야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선각자라는 권위를 지닐 수 있었다. 실제로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들은 수많은 지식과 지적 능력, 통찰력을 요구하고, 특정 미디어와 매체에 대한 접근 기회는 일종의 그러한 능력에 관하여 검증하는 단계로 작용한 것이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진정한 대중문화의 시대가 열렸다.
모두가 소비자이면서 생산자가 되었고, 대중문화의 생산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간택당하는 입장이 된 셈이다. 그것이 소설이든, 그림이든, 영상이든 간에 컨텐츠를 생성하는 생산자들은 소비자들의 손쉬운 접근기회만큼이나 분야를 가리지 않고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것이다. 과거에 분야 내에서 경쟁이 이루어졌다면, 이제는 모든 분야에서의 경쟁이며, 중요한 것은 주목도가 아니겠는가.
이는 보다 많은 소비자에게 강력한 인상을 심어줌으로써 간택받아야 하는 광고의 속성과도 일치한다. 어떤 내용이든, 어떤 형식이든, 합법적인 한도내에서 주목만 받으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한 점을 광고는 기가 막히게 파고 들었고, 광고효과의 보상으로 막대한 돈을 안겨 주었으며, 대중문화 생산자들은 광고효과와 그에 따른 보상에 치중하게 되었다.
정당한 노력과 그에 따른 대가는 당연하며, 사실 어그로를 끄는 것도 일종의 광고 능력으로서(?) 그만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대중문화의 홍수 속에서 컨텐츠의 질적 저하는 거의 필연적이다. 엄밀히 말해서 문화라는 것에, 즐기는 것-선호도에 질적 차이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검증되지 않은 루머들이나 거짓말, 왜곡, 규제와 비규제의 외줄타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컨텐츠들은 분명히 말해 질적 가치가 낮다고 할 수 있다.
이것들은 분명히 주목도가 높지만, 컨텐츠 생산자들이 부담해야 할 비용들을 소비자에게 떠넘기고, 사회적 비용을 증대시킴으로 사회를 과부하되도록 만든다. 예를 들어 가짜뉴스 같은 경우, 아니면 말고식으로 주장함으로써 교차검증을 해야 하는 비용을 소비자에게 떠넘긴다. 그리고 이것들은 사회적 논란을 만들어, 정작 주목받아야 할 중요한 사회문제는 내버려둔 채 소모적인 논쟁을 하도록 만든다, 또한 경쟁하듯 만들어지는 자극적인 컨텐츠는 악영향을 끼쳐 사회적 비용을 증대시키기도 한다.
여튼 간에, 경제적 논리로서 어그로-주목도라는 정당한 능력(?)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셈이지만, (어그로를 포함한) 대중문화의 홍수 속에서 기존의 대중문화 생산자들은 대중들에게 간택당하기 위해 발버둥쳐야만 한다. 대중문화에는 다수의 선택이냐, 외면이냐하는 오로지 두 가지 길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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