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존실/잡념들-생각정리

당위법칙들, 지적질 이전에 기본예절부터

어둠속검은고양이 2019. 10. 8. 22:00

당위의 원칙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무척이나 쉽다.
정확히 말해서 당위의 법칙만을 원칙으로 삼아 잣대를 적용시키거나 남을 지적하는 것이 쉽다는 소리지, 사실 당위의 원칙대로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충분히 어렵고 불가능에 가깝다. 애초에 세상은 당위법칙대로 흘러가지도 않고, 당위라는 것은 허구에 가깝기 때문이다. 당위는 애초에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임시 약속에 불과하니까.

그런 사람들이 있다. 모든 일들과 사건에 당위법칙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그들에 당위법칙은 마치 성서에 나오는 모세의 십계명과도 같아서 절대적으로 지켜야만 하는 그러한 신성불가침인 규칙과도 같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여기는 법과 불법을 구분짓는 당위법칙은 '최소한'의 약속일 뿐이고, 도덕적인 것은 얼마든지 시대에 따라, 문화에 따라, 그리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임시적 약속일 뿐이다.

이렇게 글로써 풀어놓으면 다 동의를 표한다.
'그렇지. 도덕이라는 것은 변화하지'라고. 그리고 좀 더 나아가 '그렇지. 사기나 살인, 강도 같은 것도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라고 동의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이러한 것에 동의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사기나 강도가 정당화 될 수 있지?'라고 항변하기도 한다. 물론 그러한 것들이 정당화될 수 없기에 현대 사회에서는 처벌을 하고 있는 것이고, 부분이나 정상참작에 그칠 뿐이다. 여튼 간에 중요한 것은 동의할 수 있는 기준점이 사람마다 제각기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글로 써놓으면 다들 고객을 끄덕이다가도 현실로 돌아오면 당위법칙의 잣대만을 들이미는 행위들을 하는 이들이 자주 보인다. 나의 티스토리 제목이 '생각의 끝은 현실이어야 한다'처럼 난 지극히 현실주의자이다. 당위법칙은 분명히 중요한 것이고, 나 역시 이에 대해 고민을 해본 적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당위법칙들은 현실에 내려오는 순간 여러문제가 얽히게 된다는 것이다. 인적 문제, 자원 문제, 기술적 문제 등으로 당위법칙 실현이 불가능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싸그리 무시한 채, '우리는 옳은 소리를 하니까'라는 이유로 거만하게 굴면서 타인을 향해 지적질하거나 독설을 퍼붓는 이들이 많다. 당위법칙은 모든 사람의 삶에 채워지는 일종의 족쇄와 비슷하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우리 삶을 통제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취미와 취향을 당위법칙에 따라서 규제하면 어떻게 될까.

텀블러 모으는 취미가 있는 사람에게는 쓰지도 않을 상품을 수집하는 것은 자원낭비와 환경문제로 지적하고, 신체를 자랑하기 위해서 운동하는 사람에게는 성상품화라는 딱지를 붙이고, 먹거리를 찾아다니는 취미가 있는 사람에게는 육식이나 자원낭비, 환경파괴를 이유로 '옳지 못한' 취미라고 지적할 수 있을까.

소비라는 것이, 취향이라는 것이 고유의 영역으로 존중받아야 되는 영역이고, 오래 전부터 그래왔지만 이것들이 어느 순간부터 '올바른 소비'라는 것으로 도덕적 영역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올바른' 소비가 사회에 울리는 경종은 대단하다. 생각없이 소비하기 전에 환경을 생각하고, 노동 착취를 생각하고, 기업에게 사회적 책임을 다할 것을 생각한다는 점에서 분명 필요하고, 존중해야 할 영역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회적 공동체에서 비롯된 당위의 영역들을 개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라는 것이며, 사회적 운동에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기술적이든 현실적 문제든 어떠한 이유로)불가능한 부분과 가능한 부분, 편한 부분과 불편해지는 부분을 분명히 구분짓고, 다른 이들에게 '부디 모두를 위해서 불편함을 감내해주세요'라고 '설득'의 과정을 거쳐야지,' 강요'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당위법칙의 잣대를 타인에게 함부로 들이밀면서 지적질하는 것은 당위 이전에 사람이 지켜야할 기본 예절마저도 지키지 않는 것이다. 기본 예절을 지키지도 않으면서 타인들이 자신의 말을 들어줄거라 착각하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