싹둑. 싹둑.
내 머리를 자르는 그녀의 손에서는 봉숭아 향내음이 났다.
그녀의 손톱이 진한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미용사였다. 그것도 나이가 많은.
허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용사는 손님의 요구에 맞춰 머리를 잘 자르기만 하면 될 뿐이지, 나이가 많고 적고가 무슨 상관인가. 그녀와 나의 관계는 머리를 자르는 미용사와 머리를 자르러 온 손님 한 명,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아니, 없을 터였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 의미는 변화되었다.
찾아가는 이유도 점차 늘어났다. 염색을 하고 싶어서, 매직을 하고 싶어서, 앞머리를 다듬고 싶어서 등등.... 이유가 늘어날수록 내 머리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혹한 환경에 처했다. 그녀는 손상된 내 머리를 위해 트리트먼트와 헤어 에센스를 사용해주었다. 앞으로도 쭉 이어질 VIP의 대우라도 하듯이 자상한 손길로, 무료로 듬뿍 발라주곤 했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걸림돌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에게는 그녀의 의미가 변화되었을지라도 나이가 많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성숙한 듯한 그녀의 분위기는 나를 고조시켰다. 묘한 느낌이었다. 아직 대학생 티를 벗지 못한 듯한 나의 어수룩한 사회 초년생과는 달리 사회생활에 이골난 것을 넘어서서 자신의 뜻대로 이리저리 다루는 듯한 느낌의 그 여유로움과 성숙함은 나를 끌어들었다. 하지만 그 끌어들임이 무엇을 향한 것인지는 나도 모를 일이었다. 단지 나는 취해 있었을 뿐이다.
현실은 취기에 몸을 못 가누는 나를 책망이라도 하듯 혹독하게 채찍질을 해댔다. 어서 그 취기에서 깨라는 듯이.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단지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고 있을 뿐이었다. 어째서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았을까...
먹고 살기 바빠서? 결혼에 흥미가 없어서? 주변에 마땅한 상대가 없어서? 여러가지 의구심이 꼬리를 물고 늘어졌지만, 나의 호기심은 좀처럼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를 자를 때면 늘 차분한 목소리로 조근조근 머리스타일에 대해 이야기를 해댔다. 그것은 순전 내 머리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미용사가 손님의 머리 스타일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주고 다각적으로 분석을 해준다는 것은 분명히 기뻐할 일이었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기뻐할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머리가 고생하는 만큼 이미 나는 내 머리스타일에 통달해서 스스로 스타일리스트가 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지겹지도 않은 지, 늘 즐겁게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대체로 새로웠다. 그녀는 그녀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연구하고 있는 머리 스타일, 나와 비슷한 머리형태의 손님이야기, 가발에 대한 이야기 등등 다양했다. 그녀의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가끔 고양이 이야기, 날씨 이야기 정도뿐.
미용실을 꾸준히 다닐수록 나는 마을의 정보에 통달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미용실은 인기가 많았다. 사람이 꼭 1~2명은 있었고, 내 머리가 다듬어질 동안도 꼭 1~2명씩은 들어왔다. 주말엔 4~5명의 여자들이 모여 마을정보를 교류하는 일이 잦았다. 듣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레 귀에 들어오는 이야기들. 누가 사기를 당했다더라. 누가 결혼했다더라. 누가 불륜을 저질렀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동네 사람들의 신상파악을 훤히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풀렸다.
그녀는 이혼녀였다. 나에게 있어서는 이혼녀가 드문 것도 아니고, 범죄자도 아니고, 결혼하고 이혼했다는 것이 무슨 대수인가 싶었지만, 어찌됐든 '사회적' 걸림돌이 하나 더 늘어났다는 것은 사회에 어수룩한 나도 알아챌 정도였다. 2가지 걸림돌은 이미 그녀의 신상명세서의 일부가 되어 사람들 사이를 떠돌아 다니고 있을 터였다. 그녀의 신상에 내가 포함되면 어떨까? 생각해보았다.
호기심이 풀리는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3달이 걸렸는데, 그 3달동안 내가 미용실은 간 것은 세어보니 10번이었다. 10번 끝에 얻은 정보가 걸림돌+1이라니......4달이 되었을 때, 그녀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전남편에게 있는 아이를 되찾기 위해 조만간 가게를 접고 이사 간다는 말이었다. 그녀는 이사가는 곳이 어딘지 말하지 않았다.
"제가 머리를 잘라주는 것도 마지막이네요. 이제 머리가 손에 익었을텐데, 미용사가 가버려서 아쉬워하겠네요." 라고 말하면서 그녀는 헤어에센스를 하나 건넸다. 꾸준히 바르라면서.
아마 그 때가 벌써 3년 전이다.
나는 한동안 머리를 자르러 가지 않았다. 다만 에센스만큼은 꾸준히 발랐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1회분만큼의 에센스를 미처 쓰지 못한 채, 새로운 에센스를 쓰기 시작했다. 새로운 에센스를 추천해주신 미용사는 나를 닮은 듯 닮지 않은 호빵맨같은 자상한 얼굴의 남자 미용사다.
남자 머리는 남자 미용사분이 가장 잘 안다는 얼토당토 않은 말로 나는 가까운 미용실이 아닌, 멀리 남자 미용사가 있는 미용실을 다니기 시작했다. 3달간 머리를 기르고 난 뒤였다. 이 남자 미용사의 손톱은 아주 정갈하다. 미용실에 걸려 있는 미용은 곧 청결이라는 문구와 일치하리만큼이나.
3년간 다닌 끝에 그 미용실은 내가 가면 자동으로 머리를 알아서 잘라준다. 물론 그 미용실에서 염색을 하거나, 매직 따위를 한 적은 없다. 원래 머리에 뭔 짓 하는 걸 안 좋아했으니까.
의자에 앉았을 때, 어느 새 못보던 여자의 손이 내 머리를 다듬는다. 남자 미용사는 뒷정리를 하느라 바쁘다.
싹둑. 싹둑.
내 머리를 자르는 그녀의 손에서는 봉숭아 향내음이 났다.
...........내가 그 에센스를 어디다 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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